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며 //강 인 한
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며 //강 인 한
시는 전달에 앞서 표현돼야 한다. 시는 예술에 속하되 언어를 재료로 쓰는 특수성을 생각할 때 언어적 측면이 고려된 예술이 아니면 안 된다. 시는 언어로 표현된 자체가 예술일 수 있으면 족하며 그것이 전달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라면 예술에서 궤도를 이탈하여 프로파간다로 나아가기 쉽다.
시는 다른 문학 양식들에 비하여 짧고 함축적이며 음악성을 띠는 특징을 가진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란 미(美)의 운율적인 창조이다"라고 말했고, 매슈 아널드는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가 지금도 적용돼야 한다는 게 내 견해이다. 요즘 들어 우리 시에 이상하게도 산문시가 많이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현상은 ‘이상한’ 경향이지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산문시라 해도 시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갖춰야만 시가 될 것이다.
산문시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단지 짧은 단편적인 사유를 풀어 쓰거나 근사한 에피소드를 산문으로 쓰고서는 시라고 내밀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시적 긴장도 없고, 참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배려도 없고, 음악적인 유희와 함축의 의미를 추구하는 즐거움이 배제된 산문— 단순히 짧기만 한 글이어서는 시가 아니다. 다음의 예를 읽어보자.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이 글은 2인칭인 ‘당신’을 중심으로 서술된 글이다. 서사의 골격을 갖추고 있으나 간간이 서정적인 문채(文彩)를 가미한 인상적인 산문이다. 아마도 이 글은 어떤 소설의 개요로 쓴 게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압축된 서사이다. 그 압축된 문장들에서 시가 지니는 함축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는 문장에서 요리조리 시적인 함축성을 궁리해 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필자 마음 속 깊이 감춰진 특별한 사연일 것이므로 독자가 그것을 귀신같이 헤아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의 한 부분을 떼어낸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압축된 개요에 살짝 위장(僞裝)된 서정을 가미한 것이 시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요즘 이러한 산문시가 횡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행갈이가 있는 자유시 형태로 쓰면 너무도 쉽게 자신의 미흡한 시적 역량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약간 길고 독해하기 곤란한 산문 형태 뒤에 숨어서 자신의 진면목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해서 그들은 산문시라는 가면 뒤에 숨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진보적인 시인들 가운데 예술의 표현 방식이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것은 무조건 진부하다고 물리쳐버리고 새로운 것만이 최선의 표현 양식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십 년 세월이 넘은 오늘에 와서도 구태의연하게 김소월 류의 감상적인 영탄이나 청록파 시인들의 서정을 답습하는 건 미상불 시대착오적인 꼴불견일 것이다. 하지만 새것이라 하면 좋은 것만 있는 것일까. 이른바 아방가르드만 지고지선이며 무등(無等)한 최고 예술일 것인가. 모든 전위는 비록 치명적 결함을 내포할지라도 오로지 전위이기 때문에 추앙받는 예술로서 충분한 것인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은 프랑스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그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를 미술관의 바닥에 내려놓고 「샘」이라는 명제를 부여했을 때 그의 혁명적인 고안에 감탄하고 보편적인 예술의 권위주의에 반기를 든 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방가르드란 이런 것이라고. 그러나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저기에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참담한 노력과 수없는 좌절 끝에 이루어진 빛나는 예술로서의 독창성이 있는가. 또 생각해 보자. 벌거벗고 거리에 나선 임금님에게 모든 이들이 머리 조아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의상을 입었노라고 칭송하여 마지않는 것과 저것이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그럴싸한 이론으로 치장하고 얼버무린 사기(詐欺)를 대단한 예술이라고 떠받드는 건 한갓 코미디일 뿐이다. 저 「샘」이라는 고상한 명제를 떼어내고 화장실이건 아무 벽에나 갖다가 걸어보라. 저 소변기가 호강스런 자리를 떠났을 때 그것은 단순한 소변기의 본질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위적인 해체주의 시가 한참 떠들썩할 때였다. 신문의 짤막한 광고기사를 편집하여 황지우 시인이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가슴이 저리도록 공감할 만한 시였다. 바로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사라진 실종자들의 사연을 다룬 시였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오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심인」
그런데 이렇게 편집되고 약간 시적인 의도를 가지고 손질된 기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사문 전체를 인용하여 ‘시’라고 내놓는 경우는 어떠한가. 진취적인 아방가르드의 구현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으나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이 시집 아닌 곳에 수록되어 읽힐 때 본질적으로 시일 것인가.
경찰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였다. 20일 오전 5시 30분, 한강로 일대 5차선 도로의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경찰 병력 20개 중대 1600명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대테러 담당 경찰특공대 49명, 그리고 살수차 4대가 배치되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강로 2가 재개발 지역의 철거 예정 5층 상가 건물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중인 세입자 철거민 50여명도 경찰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최후의 자위책으로 화염병과 염산병 그리고 시너 60여통을 옥상에 확보했다. 6시 5분, 경찰이 건물 1층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곧바로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6시 10분, 살수차가 건물 옥상을 향해 거센 물대포를 쏘았다. 경찰은 쥐처럼 물에 흠뻑 젖은 시민을 중요 범죄자나 테러범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6시 45분, 경찰특공대원 13명이 기중기로 끌어올려진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에 투입되었다. 이때 컨테이너가 망루에 거세게 부딪쳤고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 물대포를 갈랐다.
7시 10분, 망루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7시 20분, 특공대원 10명이 추가로 옥상에 투입되었다. 7시 26분, 특공대원들이 망루 1단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 격렬히 저항했고 이때 내부에서 벌건 불길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으며 큰 폭발음과 함께 망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물대포로 인해 옥상 바닥엔 발목까지 빠질 정도로 물이 흥건했고 그 위를 가벼운 시너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때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농성자 3, 4명이 연기를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날의 투입 작전은 경찰 한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시대에 발붙이고 사는 힘없는 서민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떨리는 공분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런 글이 보편적인 시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예술적 고안이나 손질 같은 가공이 더 필요하다. 그나마 무시해버리고 이런 산문, 아니 기사문을 시라고 발표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능력 부족을 높은 시정신의 추구라는 것을 핑계 삼아 호도(糊塗)하거나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술적인 아이디어, 예술가로서의 진정성, 그 자체는 충분히 시의 고귀한 원석이긴 하되 아직 시라는 보석은 아니다. 시는 전달에 앞서 표현되어야 하는 예술이다.
시가 지니는 요소 가운데 미적 구조를 지향하는 모호성(ambiguity)이라는 게 있다. 그것도 일정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온전한 문장의 토대 위에 구현되는 모호성이라야만 올바를 것이다.
한 욕조에 든 것처럼 비린 그늘 쏟아졌다 먹먹하게 헐떡이는 너의 아가미가 밀려들어오면 바다, 그 물비늘들이 끝내 나를 눈멀게 했다 엎질러진 그림자를 황급히 주워담으며 자꾸만 늑골 어디쯤이 흥건했는데 아아 네 속에 들어 이제는 반만 처녀인 나를 어쩌면 좋을까 눈부신 모습 뒤로 습한 그늘을 숨기는 습관은 너에게 배운 것이어서 감당하지 못할 살만 골라 사랑했던가 수맥의 흐름 속으로 콸콸 흐르고 싶은 내가 또 네가 아찔했다 고단한 뿌리를 움찔거리는 너,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치명(致命) —이혜미, 「측백 그늘」부분
관능적인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 그 이미지들이 이루어 내는 아름다운 리듬은 사람인지 물고기인지 모호한 ‘너’라는 존재와 네 속에 든 ‘나’라는 존재의 사랑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모호성은 하나의 미적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호성이 단지 독자의 이해를 방해하고 혼란시키기 위해서 구사되는 건 대단히 불순한 저의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장식된 옷을 입은 조상보다 벌거벗은 조상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했던/ 틀림없이 인종의 부엌에 대한 나의 존경이 자명했거든./ 그해의 아동보호시설은 계절에 이끌려 요절 밖을 기어 나왔거든,/ 거울 속을 지느러미로 헤엄치는 미끄러운 감격에 놀라며/ 이 개화는 암술이 꽂힐 때마다 지평선을 끊고 평등의 악취를 오지 않는 빛에 비춰봐야 했거든.
문장은커녕 한 마디 말도 안 되는 이런 글을 줄줄이 엮어서 시라고 우기는 데에 이르러 우리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는다. 단지 모호성만을 발생시키기 위한 난해함, 비문의 남용, 비논리적 전개 등, 또는 신들린 무당의 난삽한 주절거림과 이런 글이 어떻게 다를 것인가. 온갖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이런 글에 바치는 어떠한 헌사도 ‘시의 본질’이라는 거울 앞에 서게 된다면 감히 얼굴을 쳐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 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정효구(문학평론가, 충북대 교수)
1. 자신을 '필터링'하라
우리 시는 지금 지나치게 이완돼 있다. 언어가 절제되지 못한 채 소란스럽거나, 지루하다. 다변, 요설, 장광설, 한담, 사소한 언설의 즉흥성이 시의 시다움을 위협하고 있다.
시인들이 표현하는 것이 감각이든 감정이든, 생각이든 이념이든 그 자신의 내면은 물론 그 언어를 마지막 단계까지 '필터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르고 걸러서 더 이상 걸러지지 않는 종자 씨앗 같은 것, 부서지지 않는 금강석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시 속에 들여놓아야 한다. 이 바쁜 세상에 누가 여과되지 않는 남의 말을 경청하겠는가. 설혹 한가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누가 여과되지 않은 남의 말을 계속 흥미롭게 들어주겠는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특히 점점 그 숫자를 더해 가는 문학지의 양과 발표 면의 증가는 시인들의 내면과 언어를 이완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단속하는 것은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며, 문학 외적 경계에 끄달리거나 휘둘리는 것은 그의 책임이다. 그리하여 엄격하게 여과되지 않은 내면과 언어가 그대로 발설될 때, 그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한 존재의 구업(口業)이며, 신업(身業), 의업(意業)이다.
비유하자면, 텔레비전 채널은 많은데 볼 만한 프로가 없듯이, 홍수 속에 식수 없듯이, 신문의 면수는 두꺼워지는데 기사의 질은 떨어지듯이, 뷔페식당에서 먹을 것이 없듯이, 우리 시단과 시인 그리고 시 작품은 여과되지 않는 양적 공세 앞에서 지금 위험한 양상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 제정신을 찾을 때가 되었다. 시 정신을 돌볼 때가 되었다.
그 첫 번째 주문으로 나는 시인 자신의 내면을, 시의 언어를 마지막까지 홀로 그만의 방에서 엄격하게 '필터링'하라고 말하고 싶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윤동주의 말을 다시금 음미해 보고 싶은 것이다.
2. 독자와 소통하라
한때 시인들은 독자들을 원망할 때가 많았다. 특히 대중 독자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할 때가 많았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시를 공들여 써내는데 어찌하여 그 시를 제대로 읽을 능력이 되지 않거나, 읽으려 하지 않느냐고, 문제의 원인을 독자 편에 돌렸던 것이다.
일면 맞는 말이다. 이런 점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제 이와 더불어 또 다른 측면에서 '커뮤니케이션' 혹은 '소통'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 시단은 일반 대중독자들뿐 아니라 전문 독자들까지 시인들과의 소통이 어려워지는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
소통이 부재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경험의 상이성, 말하기 방식이나 언어 표현의 구조적 상이성, 감수성과 가치관의 상이성 등등이 그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부차적이다. 우리 시단을 돌아볼 때, 더 중요한 원인은 시의 자폐화와 마스터베이션화, 공공성의 상실, 요령부득의 언어가 남발되고 있는 현상에 있다.
시란 누가 뭐라 해도 말하기 방식의 일종이다. 다시 말하면 화법의 일종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의식하고 그와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것이다. 만약 소통을 거부하고 자폐적인 은어로 혼자 말하고자 한다면, 그냥 자신의 수첩에 써 놓으면 된다. 그때 적어도 그 자신이 화자이며 청자가 되는 기쁨이 그 안에 있지 않겠는가.
시의 언어가 함축적, 개성적, 창조적인 것이라고 하여, 소통까지도 불가능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언어가 지닌 이러한 특성은 오히려 더 깊은 소통을 은밀히 이룩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시인들이여, 특히 젊은 시인들이여! 시의 자폐화 경향을 적극 넘어서라. 아무리 공공의 지대가 상실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취미만 남는 것 같은 현실이 다가온 듯하여도,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시의 현실이며 삶의 현실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아라.
어느 때보다 소통이 필요한 때이다. 현대적 개인의 발전 너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인의 단절과 칩거가 아니라 그것의 초월이자 극복이다.
3. 혜안(慧眼)으로 심연을 관(觀)하라
시를 읽는 일이 점점 더 심심해진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어 죽비로 존재의 안쪽을 내리치듯 '서늘한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 비슷한 소재, 비슷한 상상력, 비슷한 언어, 비슷한 주장,비슷한 문체, 비슷한 문제의식 앞에서 갑갑한 심정이 될 때가 많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이렇게 비슷한 것들이 많을까? 좀 다르면 안 될까?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멋진 시단을 만들어내면 안 될까?
상상력과 언어의 유사성이 한 시대의 집단의식의 산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아도, 특별한 존재로서의 문제적 개인이자 시인을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유사성을 보는 마음은 답답하다.
나는 생각해 본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그것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지성의 부재요, 공부의 부재이다.
생각은 우리를 새롭게 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함으로써 나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남이 갔던 길, 그 자신이 이미 갔던 길을 다시 가면서 그것을 가리켜 '생각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생각은 공부에서 나온다. 그 공부가 교과서적인 지식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 것이다. 시인은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이지만, 공부와 생각이 뒷받침되지 않는 감수성은 위태롭고, 그것이 수반되지 않을 때 감수성조차도 진부해진다.
또 다시 생각해 본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자기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목소리를 그 자신의 목소리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눈을 뜨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눈을 그 자신의 눈으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에다 '혜안으로 심연을 관하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을 붙였다. 여기에는 실상을 보자는 뜻을 역설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금강경(金剛經)』을 보면 다섯 가지 안목이 나온다.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 그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급수만 조금씩 다를 뿐 시인들 역시 중생 놀이 하는 중생심에 젖어 육안으로 겨우 세상을 바라보며 말을 해보는 데 불과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혜안'을 들고 나왔다.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그러나 다른 눈을 뜨지 않는다면 다른 시가 창조될 수 없다.
뱀이 허물을 벗듯, 허물 벗는 일이란 너무나도 어려운 인생일대사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진흙소처럼 통과한 눈으로 바라본 세계, 거기서 탄생된 언어를 만나고 싶다.
시가 다른 언어나 세속의 양식과 구별되어 그 존재 의미를 찾으려면, 눈을 떠야 한다. '혜안'을 꿈꾸어야 한다. 그 안목에 포착되는 세계가 노래되어야 한다. 눈을 뜰수록 우리는 깊이 볼 수 있다. 깊이 볼수록 한번도 건드리지 않은 시인의 심연에서 솟는 샘물을 만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견자(見者)'가 될 수 있고, 그 언어와 시 앞에서 독자들은 크나큰 전율과 거듭남의 환희심을 맛볼 수 있다.
4. 혼을 넣어 헌신하라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가 먹어서 살로 갈 만한 하나의 언어적 세계를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시가 나르시시즘이나 자기현시, 더 나아가 자아 우월감이나 자아 한탄과 같은 소아적 도구성을 넘어서서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식당은 많고 간판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화려한데 진정 먹고 살로 갈만한 음식을 해주는 집은 많지 않다. 만약 그런 집이 있다면 그 집은 수많은 경쟁 속에서, 간판이 화려하지 않더라도, 손님이 줄을 서서 찾는 집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말로 드러내진 않는다. 그러나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 직감적으로 그것이 어떤 실체이며 본질을 담고 있는지, 그것을 보거나 느낄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우리 시단의 시를 보며, 앞의 이야기와 같은 상황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우리 시가 진정 자아의 도구성을 넘어 혼과 진정성을 담은 헌신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을 해본다. 제아무리 멋진 수사와 문체를 자랑하여도, 제아무리 말끔한 형식적 특성을 갖추었어도, 작품 속에 혼이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은 점점 그 작품과 깊게 만날 수 없다.
이것은 시를 쓰고 발표하는 시인의 자세와 태도의 문제에 결부된 사항이다. 한 작품 속에 진정 혼이 들어 있는지 어떤지는 시인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작품 속에 혼이 깃들 때, 따라서 그것은 먼저 시인 자신을, 그리고 이어서 그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혼은 육체를 넘어, 욕망을 넘어, 이성을 넘어, 한 존재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영기(靈氣)이다.
그렇다면 혼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이 표면만을 떠도는 세상에서 어떻게 혼을 만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혼은 대아적(大我的)인 살림의 마음 속에서 탄생한다. 그 마음 앞에서 우리는 자발적인 헌신의 자세를 가지게 되고, 그것은 영성을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된다.
혼이 깃들 때 언어는 꽃처럼 피어난다. 혼이 깃들 때 시는 호소력을 가진다. 혼이 깃들 때 시인은 도모하지 않아도 독자와 하나가 된다.
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유형의 시가 나올 수 있고, 다른 이야기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단과 우리 현실을 놓고 볼 때, 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이 필요하다. 시가 기술을 넘어, 재능을 넘어, 수식을 넘어 한 존재를 들어 올리고자 할 때, 시 속에 필요한 것은 바로 혼인 것이다. 이때 지예(至禮)는 지도(至道)와 닿을 수 있다. 시가 언어의 일로, 개인의 일로, 인간의 일로만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일심(一心)의 전일성을 생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