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시론

1. 다르게 보기, 또는 재배치

최다원 2018. 6. 26. 22:20

1. 다르게 보기, 또는 재배치

이 세계의 진리란 원래 세계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란 그래서 새롭게 창조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새롭게 발견해 내야 할 그 무엇이다.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충분히 버거운 일이다. 이때 시는 발견한 진리를 드러내는 장소이다. 그러니까 시는 일종의 존재, 즉 ‘있다’라는 실재적 차원으로 현존하며 일정한 체적 속에 진리를 담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시의 주된 본질을 미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은 칸트이며, 그 후 시의 미적 요소를 밝히는 행위가 시의 가치를 규정하는 일방통행과도 같은 방향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편향된 인식의 다른 방향에는 하이데거나 가다머 등이 있다. 그들은 시를 진리를 담고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어찌되었건 명백히 단언하건대 ‘미’는 시라는 존재의 일부일 뿐이다. 시라는 존재는 ‘미’ 말고도 더욱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진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세계의 본질을 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지나쳤거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들로 가득 차 있는 복잡다단한 세계인 것이다.

 

시를 통해 누구나 흔히 아는 얘기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현상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진리를 굳이 시로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사실들, 증명되었거나 증명되기 어려운 진리조차 과학과 수학과 종교로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는 과연 어떤 진리를,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가. 또한 어떻게 드러내야 우리에게 그것이 진정 진리의 세계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시는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다. 시를 미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단순한 시도도, 시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그리하여 그 조화로운 예술적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시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느끼게 하려면 미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시적 기법들, 은유나 환유와 같은 비유, 낯설게 하기, 직선적 시간성의 해체, 행과 연 등의 형태적 변용, 진술의 다양한 전개 방식 등등 역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진리를 드러내고 전달하고 인식시키고 깨닫게 하고 수용하고 용납하고 공감하고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한 방법들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법들 자체도 시를 진리체를 담고 있는 존재로 가능케 하는 시의 일부이기도 하다.

진리를 담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진리인 시는 그러므로 기존의 문법과는 다르게, 기존의 개념 설정과는 다르게, 기존의 관점과는 다르게 표현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다르게 보는 관점에 의한 세계의 재배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상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개념들을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다르게 배치하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접하고 분절시키며 유예시키기,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시라는 존재의 현존 형식이다. 재배치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인들이 실행하고 있는 방식일 것이다. 예를 들어 거리에 서 있는 죽어가는 나무와 누군가의 주검을 담은 관을 나란히 놓고 등가의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은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을 일이지만, 시에서는 그 둘이 갖고 있는 의미, 즉 삶과 죽음에 있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을 직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배치인 것이다. 여기에는 다만 적재적소의 배치라는 난제가 있을 뿐이다.

 

 

2. 스타일, 스케일

스타일은 일차적으로 문체를 의미한다. 스타일은 개성이나 수사학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방식의 스타일을 얘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떠한 시를 읽었을 때 독특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그 시인만의 지문과도 같은 스타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분위기와 관계가 있다. 모든 시에는 저마다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분위기는 원래 감각적으로 감지되기 어려운 실체이다. 구체적으로 시의 어떤 부분 때문에 특정한 분위기가 형성되는지 꼬집어 지적하기는 어렵다. 분위기는 사실 시 전체의 유기적 구조에 의해 발생한다.

분위기의 종류는 다양하다. 즐거운 분위기, 슬픈 분위기, 우울한 분위기, 상큼한 분위기, 날선 분위기, 긴장한 분위기, 무서운 분위기, 기괴한 분위기, 묘한 분위기, 충격적 분위기, 설레는 분위기, 행복한 분위기, 가슴 벅찬 분위기 등등. 이러한 분위기는 시의 어느 한 구절이나 한 행, 한 연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부분적인 분위기와 시 전체의 분위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에 욕이 잔뜩 들어 있다 하더라도 꼭 무서운 분위기나 기분 나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정겨운 분위기나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유기적 배치의 구조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분위기는 시인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즉, 시인이 즐거운 분위기의 시를 쓰고자 한다면 거기에 소용되는 어떠한 시어나 장치도 즐거움을 형성하는 데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

한때 내 주된 관심사는 죽음을 소재로 한 현실 표상이었다. 이 세계를 죽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곧 죽음 자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은 유한한 우리 인간이 규정한 개념일 수 있는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그 개념은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도 어떤 관점에서는 똑 같거나 무의미한 구분일지도 모르는 일시적인 개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온갖 죽음으로 무성한 시를 썼는데 이미 죽음을 삶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일상적인 현상으로 봤기 때문에, 그리고 삶이 곧 죽음이므로 이 세계를 죽음 자체로 보았기 때문에 시는 건조하고 객관적이며 죽음 외의 것을 지향할 필요가 없는 무덤덤한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죽음의 분위기를 형성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죽음의 분위기를 시에 담아내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고양된 분위기, 숭엄한 분위기, 장중한 분위기, 깨달음의 분위기, 묘령의 분위기 등등을 드러내려 하기도 하고, 진득한 분위기, 애틋한 분위기, 육중한 분위기를 드러내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를 형성시키기 위해 상승 지향의 스타일, 고답적인 하향 지향의 스타일, 사유의 스타일, 돈오 각성의 스타일로 시가 쓰이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거대 담론을 끌어오는 거시적이면서도 종횡무진 하는 활달한 문체인 것이다.

이런 스타일은 큰 규모의 스케일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스케일은 시공을 초월하고 영원을 누비는 상상력과 근원적인 성찰을 필요로 한다.

시를 읽는 이 역시 방대한 스케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시 속에서, 시를 통하여, 시에 의해 원대한 심원으로 이끌리기를 바란다. 단순히 초월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스케일은 내 지문과도 같은 스타일로 형성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그러한 분위기는 자못 진지한 것이고, 나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세계와 밀착된 세계인 것이다.

 

 

3. 큰 시의 존재성

세상에는 많은 시가 있고, 시인 각자의 개성이 녹아 있는 좋은 시들이 많다. 그 가운데 내 시는 어떠한가. 진리를 담고 있는 진리체로서의 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큰 시’를 꿈꾼다. 내가 바라는 시의 가치와 의미는 사소성에 있지는 않다. 물론 사소성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큰 시의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시는 전체로서, 존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야 한다. 큰 시의 존재성은 우선 나 스스로에게 위안이며 늘 바라마지 않는 추구의 양태이다.

그래서인지 내 시에는 자연물과 자연 현상이 자주 등장한다. 자연은 그 무엇보다 큰 존재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공적인 것과 대비될 때 보다 효과적이다. 많은 시가 내면의 언어, 심리를 드러내는 언어, 주변의 언어, 논리적 언어, 개념적 언어, 언어의 언어로 쓰이고 있는 현대에 자연을 소재로 하는 시는 고리타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물을 지시하는 언어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갔을 때 그 한 방울이 시 전체를 물들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때 소재의 빈곤이나 자기 소재 모방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니 늘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 시는 어제의 시와 다르기 때문에 문학이라는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늘 달라야 하며 늘 바뀌어야 한다. 그 가운데 나 스스로 보기에도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 시이다.

오늘 내가 쓴 시는 내일 내가 쓸 시의 결함이다. 하여 나는 오늘 내가 쓴 시가 못 다 이룬 바를 다시 내일 쓸 시에서 이루고자 애를 쓴다. 이런 추동으로 내가 쓸 마지막 시는 늘 어제의 시가 못 다 이룬 세계를 좀 더 명백히 드러내려는 고뇌의 흔적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 시가, 그 고뇌하는 존재로서의 시가 있는 한 세계는 또 하나의 우주를 껴안고 있는 셈이다. 큰 시라는 우주의 존재는 실재적이다. 그 우주가 실재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시의 토대 - 이수명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들과의 밀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들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공황 상태다. 의식은 마비 상태에 가까운 무력증을 드러내고, 두뇌는 기능을 잃는 듯이 여겨진다.가진 것을 잃은 것이다. 이는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을 잃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다.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무장 해제된 정신이란 정신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시는 정신이 거느렸던 기존의 무기를 버리고 무기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새로운 무기이다. 더 날카롭고 강력한 무기이다. 감각은 새로운 차원의 감각이어서 시각과 청각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감지할 수 없었던 것들을 포착하며, 인식은 사물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로 나아간다. 투시하고, 침투하며, 스며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교란을 가져온다. 앞에 서서 흔들어 버리는 것, 정신의 전위,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위해서는 내면에 무엇보다도 황무지를, 개간되지 않은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거칠고, 황량하며, 무의미한 황무지가 펼쳐져야 한다. 주어진 모습을 찬양할 뿐,바늘 하나 꽂을 수 없게 가꾸어진 정원의 창백한 충만은 시가 들어서기엔 운위의 폭이 너무 좁다. 무의미한 황무지에서 보내야 하는 맹목적인, 무차별적인 시간은 정신을 소모시키며, 그러므로 들끓는 정신을 소비하는 데 황무지는 필수적이다. 황무지가 넓고 광활할수록, 필요 없는 삽질을 깊이 할 수 있으며, 깊이 들어갈수록 수맥을 만날 가능성은 넓어진다.

 

이미지 혹은 말

이미지와 씨름하는 시인이 있고 말과 씨름하는 시인이 있다. 이미지는 묶여 있고, 말은 풀려 있다. 이미지는 사로잡으려 하고, 말은 해방되려 한다. 이미지에 의한 이미지 비판이 더 강력한 이미지로의 전환이라면, 말에 의한 말의 비판은 막을 수 없는, 커 가는 심연에 대한 말들의 동원이다. 이미지를 지향하는 시는 구상에 가까워지고, 말들을 운용하려는 시는 추상에 기울어진다.

언제나 이미지나 말을 찾아 헤매는 시인들은, 이미지나 말들이 침입하는 순간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는다. 이렇게 가까이서 오는 시가 있는가 하면, 아주 멀리서, 뜸을 들여, 힘겹게 오는 시도 있다. 그때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손을 내밀어 끌어야 하며, 그 거리를 단축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예컨대 어떠한 한 순간 혹은 하나의 말을 폭력적으로 가로막거나 잡아채기도 하고, 이미지들과 말들을 새로운 공간에서 혼합, 배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시의 밖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 정체를 깨닫지 못한다. 지루한 수작업이 계속 될 뿐이다. 멀리서 오는 시는 이러한 미궁 속에서 대체로 완성된다.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시 속에 녹아 들어 있다.

이미지나 말과 씨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험난한 과정임을 암시한다. 이미지나 말은 대개 문을 닫아 걸고 있다. 문을 열고 눈앞에 있어도 어딘가 다른 곳에 그들이 존재하는 듯이 여겨진다. 그 다른 곳을 찾아 다가가지만, 그 다른 곳은 또 다른 곳에 있다. 시를 쓰는 일은 패배의 연속이다. 문 앞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서기 마련인 것이다. 시인에게는 뇌 속으로 땀이 흐르는 일이다. 하지만 저항이 강력할수록, 강한 폭포수일수록 그것을 역류한 물고기는 생명력이 넘친다.

 

사물들

사물들은 상상 속에 존재한다. 상상 되었을 때 사물들은 시로 들어온다. 이것은 사물이 상상 속에서 구성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다. 빛, 색채, 음향, 질감, 냄새, 속도, 움직임 등등.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물의 이미지는 가장 중요하다. 이미지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고, 있다 해도 알 수 없다.

사물들은 눈앞에 현존하고 있지만 현존 속의 부재, 즉 제 육체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불러내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물들이 물질 단위가 되어 물질의 감수성으로 운동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여러 방향의 상상이 촘촘히 얽혀야 한다. 상상이 명료할수록 사물의 움직임도 선명하다. 상상은 사물의 집, 존재의 집이다. 집 속에서는 사물들은 침묵이라는 죽음의 외투를 벗는다. 그들은 분주히 이동하고, 넘나들고, 흩어지고, 모여든다. 불투명한 것은 투명해지고, 투명한 것은 불투명해진다.

시 속으로, 상상 속으로 들어온 사물들은 매혹하는 사물들이다. 매혹적인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그 사물들은 선명하면서도 붙잡을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다. 시인이 사물들에 충분히 매혹되어 있을수록 사물들은 압도적이면서도 모호하고, 순간적이면서도 다면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다.

시인은 사물의 이러한 우월성에 순종해야 한다. 사물이 키가 커지고, 그림자가 길어지고, 색채가 다양해지고, 움직임이 풍부해질 때, 그리하여 시인이 아주 작아지거나 사물 속에서 사라져 버릴 때, 사물들은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확장한다. 세계는 더 많은 미지와 가능성을 얻게된 것이다.

 

운율

운율은 동의와 다툼의 화음이다. 동의하지만 다투고, 다투지만 동의한다. 시가 음향에 이끌리는 것은 시에게는 언제나 좋은 일이다.운율을 벗어났을 때 시는 행복하고, 벗어나 더 포괄적인 운율 체계를 직감했을 때 시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또는 운율에 굴복했을 때 시는 행복하고, 굴복 하여 날개를 얻었을 때 시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말과 침묵

한 편의 시에서 말과 침묵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환유의 화려한 발달이 말의 아름다운 결합을 돋보이게 하는 시가 있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침묵이 그 우위에 서 있는 시가 있다. 전자는 브르통의 「자유로운 결합」 같은 시를 들 수 있고, 후자는 본느푸아의 「소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도 있다. 말의 반대편에서 침묵이, 침묵의 반대편에서 말이 오고, 말과 침묵이 서로를 읽는 듯, 읽지 못한 듯, 무심하게 지나치는 경우이다. 이는 시를 읽을 때 말들의 소용돌이와 무관하게, 읽혀지지 않고 끝내 말해지지 않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또하나의 소용돌이가 저변을 관류할 때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미쇼의 「태평한 사람」같은 시가 있다.

모든 시는 말과 침묵이 씨실과 날실로 엮여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말은 침묵을, 침묵은 말을 잉태한다. 말 속에는 말보다 더 많은 침묵이, 침묵 속에는 침묵보다 더 많은 말이 도사리고 있다. 말은 침묵을 폭파시키려 하고, 침묵은 말을 폭파시키려 한다. 말과 침묵은 언제나 대칭을 벗어나 비대칭을 지향하지만, 다시 말해서 말과 침묵이 하나가 되기를, 침묵으로 말하고, 말로 침묵하기를 원하지만, 이는 관념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시에서 말이 침묵이 되고 침묵이 말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말은 계속되는 말을 통해서만 침묵을, 침묵은 계속되는 침묵을 통해서만 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시인은 자신이 쳐 놓은 덫에 걸린 사람이다. 시를 썼을 때에만 그는 그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펜을 잡고 언어와 씨름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시가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시에 근접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접근이 용이치 않아 불만족스러울 때는 덫이 더 옥죄어 들고,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듯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 그는 그 덫에서 해방됨을 느낀다. 한 편의 완성된 시 앞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정은 사실 이 해방감 외에는 없다. 그는 해방되기 위해 쓰고 또 쓰는 것이다.

 

시적 인식

인식이라는 것은 자립적으로,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인식 대상에 대한 형상화의 옷을 필요로 한다. 형상화는 인식에 이르는 길 같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말이라는 것도 이미 그 자체가 기초적인 단계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추상적인 본질도 말이라는 매개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말에 의하지 않고는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므로 인식이란 말에 의해 그려지는 구상화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말이라는 것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일지라도 그 말과 관련된 어떤 관념과의 관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과 함께 떠오르는 이 관념,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이 지니고 있는 인식의 측면을 시는 문체, 운율, 형식을 통해 최대한 이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인식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시적 인식이란 통상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이라는 것이 본래 인위적인 관계의 설정, 배치, 반복, 교환, 전환 등의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적 인식에 와서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와 규칙이 자유로워진다. 시에서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이상을 향한 인간 본연의 욕망이, 세계와 사물에 대한 탐구라는 인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원칙 안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

현대시라는 말은 현대에 쓰여진 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쓰여졌어도 결코 나이를 먹지 않으면 현대시이다. 어떤 시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기법이나 형식에 있어서,시적 인식의 방향에 있어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경우가 그렇다. 때로 당대에는 너무나 멀리 나아간 것처럼 보이는 시들, 그래서 불길하고, 당대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시들, 하지만 그들로 인해 극지가 있음을 알게 해 준, 스스로 극지가 되어 버린 시들이 현대시이다. 이후 그를 따르는 후대의 시들이 그를 발판 삼아 나아가려 해도 더 이상 거기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세계를 개화시킨 시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시라 할 수 있다. 현대시는 발전이 아니라 모방을 낳는 시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그 어떤 조류에도 현대시는 존재한다. 어느 조류에서든 고독하게 자신의 형식을 실험하고, 정교한 패턴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스러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현대시는 자신의 존재 양식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라는,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당대의 상황에서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떨어짐이 앞선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 동떨어진 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시 문학사의 줄기가 새로 형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