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시론

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 천양희

최다원 2018. 10. 16. 20:10

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 천양희

천양희 (시인)

저는 평소에 시는 언어로 짓는 사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詩)라는 말의 한자어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왜 절 사자를 거기에다 붙였을까요. 다 아시는 대로 절은 용맹정진하는 구도자들의 수행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도 구도자의 정신과 자세로 시를 쓰라는 뜻에서 '시(詩)'자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언어로 사원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화여대 3학년 때로, 박두진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서 등단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등단 통로가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과 {현대문학}지 추천 통과밖에 없었는데, 현대문학이 유일한 문예지였습니다. 올해로 내가 시인의 길을 걸어온 지가 35년이 됩니다. 시의 나이가 35세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그 동안 걸어온 삶의 길이나 시의 길이 너무 꾸불텅해서 내 자신을 바꾸는 데도 2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이 나이쯤에는 앞서간 여러 사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도 석가도 이 나이쯤에 삶의 절정에 다다랐지요. 예수는 33세에 인류를 구원했고, 소월(素月)도 영랑(永郞)도 파울 첼란도 실비아 플라스도 요절했지만 불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컴퓨터를 하지 못해서 원고지로 글을 쓰는데, 원고지 앞에 앉으면 사각의 모서리가 절벽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내가 그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러분이 제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 시가 밥 먹여주냐고 물으면, 나는 "시가 내 정신의 밥이다"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쌀로 된 이밥은 우리 배를 부르게 하지만, 시는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편의 시를 가슴에 넣고 하루를 너끈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한 편의 좋은 시가 가슴 속을 따뜻하게 해서 평생을 거기에 기대면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한 끼의 밥은 굶을 수 있어도, 정신의 허기는 사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시가 밥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시로써 배부른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돈도 밥도 안 된다고 주저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아예 다른 길로 가야지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피나는 노력 없이, 오랜 습작 기간 없이 시인이 되려 하고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니체는 일찍이 '좋은 글은 피의 여로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피로 쓴 글만이 진실하다고 얘기했고, 불멸의 명작을 남긴 플로베르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가리켜, '내 심장과 두뇌를 짜서 그걸 고갈시키는 과정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만큼 작품 쓰기가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그는 '한 마디의 말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하루 종일 내 머리를 쥐어짰다'라고도 토로했습니다. 오늘날 활동 중인 시인들이나 시인 지망생들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이 얘기한 것은 그만큼 시인 정신이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반문해 봅니다. 너는 과연 피의 여로를 거쳤느냐? 너의 심장과 두뇌를 짜서 토로하는 과정을 거쳤느냐? 그렇게 반문하면 어떤 때는 말문이 콱 막혀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수많은 밤을 정말 피 흘리는 것처럼 지샌 적도 많고 수많은 파지를 버렸습니다. 수많은 파지를 버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만나기 위해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몇 년 걸린 나의 시 중에 [직소포에 들다]가 있습니다. [직소포에 들다]는 13년 만에 완성된 시입니다.

[마음의 수수밭]은 8년 만에 얻어졌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얻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그믐달]이라는 시는 30분 만에 썼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포도가 익어서 향기가 나듯이 어머니가 늘 내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겁니다. 그런 게 흔하지는 않고 단 한 편밖에 없습니다.

나는 낯선 곳에 여행을 갔다가 오면 금방 시를 쓰지를 못합니다. 그때그때 메모해 두었다가 다시 한번 그곳에 찾아가서 그때 내가 왔던 심정과 지금 내가 여기 서있을 때의 심정이 어떤가 내 자신을 닦달해 봅니다. 너는 이걸로 올라가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거기서 느낌을 메모해 두었다가 와서 겨우 시를 완성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과작(寡作)인지 모르지만, 과작이라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고 다작(多作)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무슨 시를 몇 편이나 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지하철 계단에서 번개 같은 시상을 매만지며

나는 메모지를 꼭 넣고 다닙니다. 그때그때 생각이 떠오르면 장소를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서 그 생각이 떠날까봐 메모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은 적도 많습니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갈 때 사람들이 올라가는데 무슨 생각이 팍 떠오르는 겁니다. 생각이 떠날까봐 딱 멈춰 서 있는데,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가지를 못하고 짜증을 내는 겁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찰나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뒤에 사람들이 서 있고 내가 타야 하는데 문득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눈총을 받는 게 차라리 낫지 싶어서, 옛날같이 연기처럼 날려보내지 않는다는 생각에 버티고 서 있다가 겨우 한 줄을 건졌습니다. 그럴 때의 희열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누가 미친 여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자기가 정말 붙잡아야 된다는 것을 메모해 두지 않으면 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메모한 노트가 지금 수십 권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나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도 메모 부자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참 웃기는 여자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참 행복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시에 대해서 이렇게 순장을 바치거든요. 그 순정을 시가 알아주었던지 시가 나를 받아줬어요.

옛날에는 내가 시를 받아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시가 나를 받아줘야지 한 편의 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 이 시가 나를 받아주고 있으니까 시와 함께 살면서 어떤 걸 겪더라도 나는 그걸 고통이던 괴로움이던 행복한 괴로움과 행복한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시를 내 생업으로 삼는 게 팔자라면, 시를 팔자로 삼아 세상을 남들이 아무리 빨리 가도 나는 터벅터벅 낙타처럼 걸어가려고 합니다.

등단 18년 만인 1983년에 첫 시집을 냈습니다. 굉장히 늦게 낸 셈입니다. 그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시 한편 한편이 너무 구원이고 나의 구명줄이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감동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시 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구원으로 삼고 계속 시를 썼는데, 두 번째 시집 낼 때까지 내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바쳤지만 짝사랑으로 그치고 마는구나 하는 괴로움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딱 차지 않는 시들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상재한 시집이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입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때때로 울었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는데, 나도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눈물만 나는 겁니다. 두 번째 시집은 {사람 그리운 도시}인데, 도시에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사람이 그립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시집 {하루치 희망}을 낼 때는 언어의 모순을 통해서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는 전략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보면 언어유희, 동의어, 반복어 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서 발길질을 한번 한 거지요. 왜 말놀이를 많이 했느냐고 사람들이 할지 몰라도 내게는 타당성이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고 혼자서 갇혀 있을 때 무엇과 놀며 지냈습니까. 만화를 보겠습니까. 무슨 게임을 할 줄 알겠습니까. 나는 말로써 놀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놀이를 그 책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섯 번째 {오래 된 골목}에도 조금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외로움이 말놀이로도 다 메워지지를 않으니까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말놀이를 하고 동의어, 반복어를 씀으로써 내 의식의 전환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네 번째 시집 {마음의 수수밭}을 내기 전까지는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다녔습니다.

관광여행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기가 너무 힘이 들면 살아서 돌아오려고 한 여행도 있었고, 여행을 가서 정말로 살아서 못 돌아오면 안 돌아와도 좋다는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때의 여행이 나한테는 고행이었고 내 삶의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닐 때의 경험이 {마음의 수수밭} 속에 많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수수밭}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어떤 일이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죽고 나면 이 시는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다섯 번째 시집까지 나왔는데 생각해 보면 시의 길에는 에누리도 덤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라는 것이 예수의 고난을 상기시키잖아요. 왜냐하면 부활의 환희도 십자가의 수난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정도로 글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글쓰기의 궁극은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고 그 결과는 등신불(等身佛)이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시에 대해서 어떤 오체투지(五體投肢)를 해야 합니다. 자기 몸을 완전히 바닥에 엎드려서 낮춰야 됩니다. 치열하더라도 겸허하게 치열해야 합니다.

자기 시가 조금 잘 써진다고 해서 턱을 쳐들고 못 쓰는 사람을 무시하면 발전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겸허한 마음으로 치열하게 시를 써 나가야 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힘든 시하고도 나는 한몸이 되어서 정말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말입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시와 같이 있으면 내가 진실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실하고 배가 맞는다는 확실한 느낌이 옵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을 시와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어느 시인은 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맨몸으로 철조망을 통과한 사람들의 등판과 같다.' 이성복 시인의 이 말을 들으니까 내게 전율이 오더군요. 이제 시를 쓰는 자체도 우리들 삶의 문제잖아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노력의 하나라면 희망이 너무 넘쳐도 시가 안 되고 절망에 너무 질식해도 시가 되지 않습니다. 부정과 긍정이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그 자리에 꽃이 핍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자기 폐쇄성에 빠지고 맙니다.

어느날 내가 한강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연날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을 보는 순간 '아, 시를 저기에 비교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도 가오리연과 방패연이었습니다. 가오리연은 가볍기 때문에 공중으로 올라가는 시간은 굉장히 빠릅니다.

하지만 굉장히 까붑니다. 요리조리 공중을 까불다가 결국은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꽂히고 맙니다. 반면 방패연은 아주 의젓합니다. 그래서 올라갈 때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상승 속도가 무척 느리지만 한번 공중으로 올라갔다고 하면 자기 스스로 균형을 잡습니다. 그래서 꽂히는 일 없이 아주 의젓하게 하늘을 가릅니다. 가오리연과 방패연은 외형부터 다르고 몸집은 비교도 안 됩니다.

나는 가오리연을 조금 나쁜 시에, 방패연을 좋은 시에 비교해 봤습니다. 그리고 연도 날리기 전에 절대로 빨리 날려서는 안 됩니다. 잘 만들어서 띄울 때는 아주 높이 올라가고 오래 하늘을 납니다. 마음이 급해서 빨리 날리려고 하면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연을 날릴 때는 얼레를 잡은 손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얼레를 잡고 당길 때 줄을 너무 많이 당기면 끊어지고, 느슨하게 당기면 풀어집니다. 그래서 손으로 당길 때는 당기고 놓아줄 때는 놓아줘야지, 균형을 잘 잡아서 높이 올라가고 하늘을 오래 날 수가 있는 겁니다. 연이 빨리 올라간다고 해서 반드시 높이 올라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래 견디는 것도 아닙니다.

- 내가 아닌 것은 연줄을 끊듯 버려라

어느 스승이 거문고를 앞에 두고 제자한테 물었습니다. 줄을 너무 당기니까 어떻느냐고 했더니 줄이 끊어집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느슨하게 하면 어떻더냐고 했더니 음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문학 지망생들이나 등단한 신인들은 가오리연처럼 너무 빨리, 높이 올라가려고 하고 오래 견딜 줄을 모릅니다.

시대가 너무 급변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시를 써서 등단하려 하고 빨리 시집을 내서 유명해졌으면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하지만 시라는 것은 잡초 전략도 아니고 흥부전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쫓아가서 되는 것도 아니고 유행을 따라간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삶에서 체득을 해야 됩니다.

누구도 시를 써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도 중요하고 평소의 마음 씀씀이도 중요하다는 게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시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좀 느리고 좀 미흡하더라도 나는 나여야 합니다. 내가 남이 아니잖습니까. 나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나의 개성을 버리고 괜찮다 싶은 것을 닮으려고 하면 그건 벌써 이미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아닌 사람이 시를 써놓으면 좋은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닌 것은 따라가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연도 잘 날다가도 어느 순간 줄이 끊어져서 얼레를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미련 없이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걸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언어들도 어느 땐가는 나와 맞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는 자꾸 거리에 매달리지 말고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버린다는 것은 자기 안으로 단단해진다는 겁니다. 단단해진다는 것은 어떤 외부의 조건이 닥쳐도 견뎌낼 힘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견뎌낼 힘이 있다면 방패연과 같은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은 아주 평범한 것 같아도 중요한 일입니다.

독자의 관심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고 시 자체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을 만나보고 싶지만 그 시인의 시가 별로 아니면 시인도 만나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요즘의 시들은 너무 바깥에 민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도 없이 아주 포즈에 능한 시들이 많습니다. 다변과 요술을 문학적 열정과 혼동하는 시들이 있습니다. 문맥이 잘 안 통하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해독이 불가능한 시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덮으면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게 비슷비슷한 시들이 있습니다. '

아, 이런 시들은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 그런 시들을 보면서 거울처럼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평자가 이런 말에 크게 공감을 했습니다. 이렇게 감동은커녕 공감조차 할 수 없는 시들이 양산되면 너무 위험합니다. 시 독자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자꾸 수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시도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 독자 수도 줄어들고 그 동안 시인한테 갖고 있던 기대나 관심조차도 줄어들게 되면 참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독자들을 걱정하기 전에 시인들 자신이 그 치열성을 놓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시를 쓰실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걸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 시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80년대를 시의 시대라 하고 90년대를 시의 소멸 시대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런 표현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됩니다. 소멸이나 쇠퇴라는 말을 쓰기에는 90년대 시가 80년대 시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고 있고 고립시킨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종이책이 줄어들고 전자책이 나온다고 해도 종이책은 종이책 나름대로 소중함을 갖고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문명이 디지털화되면 될수록 시의 세계는 자꾸 서정성을 회복합니다.

시라는 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따라간다고 해서 좋은 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 없이 어떤 실험시가 있겠습니까. 전통이 바탕이 되는 그런 실험시가 제대로 실험시가 되지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농부들이 그렇게 잘 가꾸어 온 밭에 형편없는 씨를 뿌려서 완전히 농사를 망치는 그런 실험시들은 실험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 중에 신춘문예에 응모자 수가 날로 늘어가고 문예지의 응모자 수도 늘어갑니다. 각종 문예 창작 학교의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시집이 줄어든다고 해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위기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뭐가 더 위기냐 하면 많이 양산되고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좋습니다만 시인을 양산하게 되면 치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치열성을 잃어버릴 경우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 공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 오히려 위기가 아닐까, 청소년들의 왜곡된 시 교육이 대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고 어른이 되어도 시에 대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TV를 보고있는데 수능시험에 대비한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시인의 시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전문은 살짝 한번 보여준 다음,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체시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분석하더니 상징이 어떻고 비유가 어떻고 도치가 어떻고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시 한 편은 어디로 가고 없고 아주 쓸모없는 수사만 남발되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런 왜곡된 시 교육을 하니 어떻게 우리 청소년들이 시를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시를 가까이 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입시제도에 정말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걸 없앨까, 위기라고 하지만 경제위기만 위기겠습니까. 문화위기가 나는 더 큰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시를 들려준답니다. 학년이 높아갈수록 시를 자꾸 이해시켜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거의 100편을 외운다고 합니다. 그냥 외우는 게 아니고 자기의 가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같이 시를 획일화시키고 분석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엠허스터라는 대학이 있는데 문학창작이 유일한 필수 과목이라고 합니다. 그 교육 이념이 뭐냐고 하면 종합 사고력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이 그 학교에서는 문학, 철학, 자연과학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학교랍니다. 그래서 1,600명밖에 안 되는 초미니 학교인데도 미국 전체 인문과학대학에서 1등 자리를 몇 년간 고수하고 있답니다.

이 창작강의를 패스하려고 과외공부까지 한답니다. 일본에도 자매학교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언제 이런 학교가 생기겠습니까. 맨 일류학교만 생각하다가 언제 제대로 된 훌륭한 시인 작가가 배출되겠습니까.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데 개인의 힘이 미약하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참 분통이 터집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왕에게 영국하고 셰익스피어 중에 뭘 택하겠느냐고 누가 물었는데 인도는 버려도 셰익스피어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뭘 택하겠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의 옛날 조상들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 걸 자기네 생활 속에서 아주 오랜 전통으로 여겨왔습니다. 왕에서부터 촌부까지 다 시를 사랑하고, 뿐만 아니라 시를 통해서 삶의 도리를 배우고 자기의 꿈을 드러냈습니다.

과거시험 제도에도 관리등용 시험을 보는데 시가 제일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잘 산다고 해서 과연 잘 사는 겁니까. 퇴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이 시를 죽이고 시인을 죽인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톰 슐만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소설을 보셨지요. 영화도 상영이 되었고 비디오도 나와 있으니까 안보신 분은 빌려보시고 아이들도 한번 보게 하세요. 공부만 하라고 해서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걸 보면 왜 인간한테 시가 소중한가를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굉장히 마음을 트이게 해줍니다. 대강의 줄거리를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명문학교인 웰튼 아카데미에 키팅이라는 국어선생이 새로 부임을 합니다. 첫날 첫 시간에 키팅 선생이 휘파람을 불면서 교실로 들어옵니다. 애들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 선장이여, 우리 선장이여. 그러면서 이 시는 휘트먼의 시 한 구절인데 링컨 대통령을 찬양한 시인이 앞으로 자기를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엄격한 교육에 찌들려 있는 학생들이 너무 충격을 받고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제군은 알겠나, 너희들은 지금 전쟁중이란 말이야 전쟁. 그리고 너희들의 혼은 위기에 빠져있다. 나 너희들로 하여금 언어를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 일을 가르치겠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에반스 프리차드 박사가 쓴 감상문 21쪽을 찢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놀라서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찢습니다. 그걸 왜 찢게 했겠습니까. 이 키팅 선생은 너무 보수적이고 엄숙자의자의 교육장인 웰튼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가식과 강제의 허울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허울 속에서 아이들을 빼내어서 창조적인 인간들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를 했던 겁니다. 이런 시도가 사실은 에반스 프리차드 박사의 감상문을 찢게 한 데 대한 의미심장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남겨진 가을 - 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