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시론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천양희

최다원 2018. 10. 30. 20:27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천양희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의 준엄한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나에게 시는 무엇이며 시를 통해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시인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란 똑같은 소리 되풀이하지 말고 계속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라는 거야. 기웃거려 보니 남의 것 좋다고 흉내내지 말고 시인의 줏대를 지키며 끝없이 떠돌라는 것이지. 항상 변하면서도 그 시인의 체통과 체취, 그 무엇에도 흔들림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자아'를 향해 항상 떠나는 시가 좋은 시 아니겠어. 아직 덜 되어서 무엇인가 더 되려고 떠도는 것이 우리들 삶이므로 그 모든 것이 서로 살맛나게 서럽고 아름다운 것 아니겠나? 시인에게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없는 것, 항상 현역이지. 발표는 안해도 내 가슴 속에는 항상 새로운 시가 쓰여지고 있어. 그래 심장이 이렇게 뜨겁지 않은가. 그런 시인은 죽어서까지도 영원한 현역으로 남는 거지. 독자들 가슴 속에 매양 새롭게 쓰여지고 있을 테니까." 만년에 미당 선생이 한 말이다.

 

시인들에게 왜 시를 쓰느냐 물으면 나는 내가 아니기 위해 시를 쓴다는 시인이 있고, 말이 하기 싫어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를 쓴다는 시인이 있고, 나라는 작은 우주에 큰 우주를 들여놓기 위해 시를 쓴다는 시인이 있고, 그냥 시가 좋아서 쓴다는 시인도 있다. 무엇이 시를 정복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시인들은 아마도 '고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시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노력의 일환이라면 그 노력도 절망에 너무 찌들리거나 희망에 너무 넘쳐도 시가 되지 않는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 시가 꽃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길은 자기를 구원하는 길이다. 그러나 구원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그 누구도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으므로 고통은 위대하며 시인에게 고통은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시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는 자이며, 고통은 희망과 암수 한 몸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이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하이데거는 기막힌 말을 했지만,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뀐 오늘에는 "나 죄가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란 김종삼 시인의 「라산스카」의 한 구절이 더 정신을 때린다.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세상을 쓰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 시정신이며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시인은 말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사람임을 절감하게 된다. 시를 쓸 때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기 보다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를 쓴다는 것은 눈의 촉각으로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새로운 인식과 발견을 하게 된다. 아득히 먼 곳을 보는 원촉遠觸을 가져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미촉未觸과 복합시선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가짜시인은 언제나 타자의 이름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지만 진짜시인은 자기자신에 대해 말할 때도 타자와 함께 말한다는 옥타비오파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낯익은 세계를 낯설게 하는 것과 같다. 시에 대한 이런 자세들이 시인은 한낮에도 북극성을 볼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는 정신을 말해주기도 한다.

 

자기만의 발견이 있는 시인은 개성 있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진다. 한 시인이 자기를 독특한 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한 나라를 가진 것과 맞먹는다는 말도 있다. 시에는 깊이 못지 않게 넓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에 대한 학대와 세계안 존재로서의 자아 이 두가지가 끊임없이 교차해야 하고, 교차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자기 안의 분열과 갈등을 살아내면서 나아가는 존재들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이 간단한 물음을 언제나 가슴 속에 매달고 살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무엇을 쓸 것인가 보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시란 갈등과 결핍에서 시작되지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재발견, 체험과 상상력을 전제로 해서 어떻게 쓸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시를 쓰는 사람들을 늘 질문자의 위치에 서게 하고 각성자의 위치에 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시의 가치란 오래 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참되게 쓰는데 있다.

 

시 쓰기와 자아 찾기 - 이은봉

 

2. 시 속에서의 나, 가공된 자아

 

그렇다면 시를 쓰는 자아, 곧 시인에 의해 씌어지는 시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의적 대답은 단일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는 시에 대한 정의가 수없이 많고 다양하다는 것이 잘 증명해준다. 돌이켜 보면 시에 대한 정의는 시를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의 산물이거나 시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의 상황의 산물일 따름이다. T. S 엘리오트가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에 대한 정의가 이처럼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가 잘 닦여진, 잘 가공된 언어의 集積物인 것만은 사실이다.

언어를 질료로 하지 않는 시란 있을 수 없다. 물론 시가 아닌 '시적인 것'은 언어 이외의 질료에 의해서도 표현이 가능하다. 영상물에 의해서도, 음악에 의해서도 '시적인 것', 이른바 서정적인 것은 생산될 수 있다. 따라서 시적인 욕구, 즉 서정적인 욕구는 언어 이외의 매체에 의해서도 충분히 향유가 가능하다. 시적인 욕구, 즉 서정적인 욕구는 인간의 심미적 通全의 욕구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본능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시는 반드시 언어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언어를 떠난 '시적인 것'은 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적인 것'일 따름이다. 시라는 말에는 이미 그것의 질료가 언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여기서 언어를 강조하는 까닭은 시의 언어를 창조하는 주체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이 때의 시는 서사시나 극시가 아니라 서정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서정시를 쓰는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그것은 '나'라는 이름의, 자아라는 이름의 개인이다. 그렇다. '나'라는 개인이 발화한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서정시이다. 이 때의 개인, 곧 시를 발화하는 주체를 흔히 '화자'라고 부른다. 연구자나 비평가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부르면 '화자'이지만 시인 자신의 시각에서 부르면 말 그대로의 '나'일 따름이다. 다름 아닌 '나', 곧 자아가 쓰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 때의 '나'가 시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안에 들어와 있는 '나'도 나이지만 시의 안에 들어오지 않은 나, 시에 들어오기 이전의 '나'도 나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이 때의 '나'가 오히려 훨씬 더 의미를 갖는 '나'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의 삶에서 '나'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가. 있다면 '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나의 존재유무를 논의하기 전에 일단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할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의 실체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란 무엇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짐승이기보다는 사람인가. 아니 사람이면서도 짐승? '나'란 무엇인가. 정신인가. 물질인가. 물질이기보다는 정신인가. 정신이면서도 물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질료는 이처럼 단일하지 않다.

 

다시 물어보자. '나'란 누구인가. 시인인가. 학자인가. 학자이기보다는 시인인가. 시인이면서도 학자? '나'란 누구인가. 교수인가. 선생인가. 교수이기보다는 선생인가. 선생이면서도 교수? '나'란 누구인가. 아들인가. 아빠인가. 아빠이기보다는 아들인가. 아들이면서도 아빠? '나'란 누구인가. 형인가. 오빠인가. 형이고 오빠이기보다는 장남인가. 장남이면서도 형이고 오빠? 나란 누구인가. 악마이기보다는 천사인가. 천사이면서 악마?

이처럼 어떠한 '나'도 양자택일적으로, 이분법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복합적으로, 양가적으로, 이중적으로, 다의적으로 흔들리며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아가 갖는 이런 복합성, 양가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아' 밖의 가치를 단일하게 받아들여왔듯이 '자아' 안의 가치도 단일하게 받아들여야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이 지금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나'는 정말 가시적으로 있는가. 있다면 언제나 나는 항상 그렇게 있는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말할 것도 없이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나'이다. 본래 '나'라는 존재는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모든 객관 존재가 그렇듯이 멈춰 있거나 고여 있지 않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겨우 존재하는 것이 '나'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변하고 움직인다.

다시 물어보자. '나'는 정말 가시적으로 없는가. 없다면 나는 언제나 항상 그렇게 없는가.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는가. 없다면 어떻게 없는가. 이미 나는 광어회처럼 엷게 저며져 당신의 입 속에, 위 속에, 장 속에, 살 속에, 핏속에 흐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미 한 줌 흙으로, 한 가닥 꽃잎으로, 한 마리 여우로 몸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본래 나는 타자와 관계하면서 단지 그 관계의 양상을 통해 존재하기 마련이다. 타자와 접촉하지 않고서는 결코 현현되지 않는 것이 '나'이다. 이처럼 나는 언제나 타자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내가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의 현상으로 내가 드러난다는 것은 이미 내가 타자 속에 스며든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타자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에서의 나는 언제나 타자와 관계를 하는 '나'이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자아가 시에서의 나이다.

 

시에서 나는 타자를 내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지만 나를 타자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따라서 시에서 나와 타자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시에서는 이 때의 관계가 하나됨의 세계, 곧 동일성의 세계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의 시에는 조화와 균형으로서의 동일성의 세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일성의 세계에 대한 열망조차 드러나 있지 않은 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일성에 대한 열망은 나와 타자가 갈등하고 대립하지 않는 세계, 참된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세계는 자유가 흘러 넘치는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의 세계를 전제로 한다. 과거의 공간인 파라다이스나 미래의 공간인 유토피아의 세계는 인간이 오랫동안 꿈꾸어온 이상세계를 가리킨다.

 

이상세계를 꿈꾸어온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개별적인 자아, 곧 '나'이다. 실제의 삶을 돌아보면 이 때의 '나'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내 속에는 나만이 아닌 수많은 존재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속에 누가 살고 있다는 것인가. 가족이? 이웃이? 민족이? 자연이? 나아가 하느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느님의 또 다른 아들 사탄이? 이들과는 다른 코드의 존재들, 그리하여 부처님이 살고 있으면 어떤가? 아니 악귀들이? 아니 이들 모두가 살고 있으면 또 어떤가.

내 속에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살고 있으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어지럽고 혼란스럽지 않은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본래 '나'라는 존재는 움직이는 혼돈 그 자체라고 해야 옳다.

 

3. 참된 나 ; 없는 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는 이 혼돈에 구태여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본래부터 혼돈 그 자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혼돈 그 자체를 '나'라는 존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대부분의 '나'는 나 자신을 혼돈 그 자체로 내버려두지 못한다. 혼돈은 내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혼돈이 주는 무질서, 무질서가 만드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끊임없이 이름을 붙여 '나'라는 질서를 만든다. '나'라는 질서를 만들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살아간다.

 

이 때의 '나'라는 질서로 하여 '나'는 무수한 상처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다 보면 '나'는 상처 자체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의 상처는 '나'에게도 작용하고 '남'에게도 작용한다. 나를 억압하고 남을 억압하는 것이 '나'라는 질서, 상처로서의 질서이다.

내가 만든 '나'라는 질서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내'가 참된 '나'일까. 참된 '나'이기 어렵다. 이 때의 '나'는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래 '나'라는 존재는 없으니까. 이미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너이고, 그이고, 세상 자체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변용되는 것은 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 속에서도 내가 등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매 편의 시는 매 편의 '나'를 만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한 편의 나를 만든다는 것이 된다.

 

서정시는 본래 '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독백의 형식이다. 독백의 형식이라는 것은 시적 화자인 '나'의 혼잣말로 시의 언어가 진술된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혼자서 지껄이고 독자는 몰래 엿듣는 화법으로 전개되는 것이 서정시이다.

시를 통해 만들어진 '나'는 시 밖의 '나'가 아니라 시 속의 '나'라고 해야 옳다. 시 속에도 시 밖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분열된 '자아'가 존재한다. 시 속의 '나'가 시 밖의 '나'와 얼마간 다른 '나'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바 없다. 이 때의 '나'는 나에 의해 만들진, 가공된 '나'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시 밖의 '나'와 시 속의 '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나', 내가 만든 '나'……, 시 속에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를 알면서도 모르겠다. 이 때의 '나'는 마땅히 '나'이면서도 '나'가 아니고, '나'가 아니면서도 '나'이다. 시 속의 '나'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10년 전에 쓴 시 속의 '나'와 지금 막 쓴 시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 속의 '나' 역시 정지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나'는 아니다.

 

하지만 시 속의 '나'가 가공되고 제작된 '나', 꾸며지고 장식된 '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 속에 존재하는 '나'는 참 '나'가 아니고 시 밖에 존재하는 '나'가 참 '나'인가. 그렇지는 않다. 시 밖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며 가공되고 꾸며지는 것이 '나'이다. 시 속에서든 시 밖에서든 고정된 실제로서의 나는 없다. 시 속에서처럼 시 밖에서도 계속해서 저 스스로를 변모시켜 가는 것이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 속에서의 '나'는 본래 이처럼 꾸며지고 장식된 채로 존재한다. 시 속에는 내가 창조한 무수한 내가 散開된 채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시를 통해 내가 '나'를 지속적으로 꾸미고 장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미 '나'는 이렇게 저렇게 가공되고 제작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시 속에서의 '나'는 하나의 기교이고, 허구일 따름이다. 허구와 기교로서의 나, 일종의 장식으로서의 나……. 시 속에서 나는 항상 대상으로 분산되고 스며들면서 존재한다. 따라서 시인이 선택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나라고 할 수 있다. 시 속에서 내가 이처럼 타자화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풍경이나 화폭이 그 자체로 세계관의 선택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저 자신을 이렇게 수식하고 위장하는 '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의 본질, 아니 '나'의 본질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의 '나'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시 밖의 내가 시 속의 '나'를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시 속의 내가 시 밖의 '나'를 만드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로는 시 밖의 내가 시 속의 '나'를 만들기도 하고, 시 속의 내가 시 밖의 '나'를 만들기도 한다. 전자의 나와 후자의 내가 상호 상생시켜 가는 것이거니와, 詩作過程이 수양의 한 방법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의 안팎에서 '내'가 이처럼 상호 유추되고 전이되는 것은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나'는 나 밖의 '너'로, 나아가 '그'로 변환되는 가운데 존재한다. '너'로, 나아가 '그'로 존재하면서도 '나'는 '나'로 존재한다. 이것이 시의 안팎에서 '내'가 존재하는 역설이다.

이처럼 시의 안팎에서 '나'는 '나'일 수도 있지만 '나'가 아닐 수도 있다. 가공된 인물로서의 나, 제작된 존재로서의 나, 장식되고 꾸며진 주체로서의 나……. 욕망에 쫓기는 나, 허위로 위장된 나……. 그런가 하면 진실로 포장된 나…….

 

이들 '나' 역시 수많은 '나'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나' 중의 나……. 물론 그 '나'는 흔히 시 속에서 '진실'을 포획하기 위해 희생되기 일쑤이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허구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 '나'라는 뜻이다. 이 때의 '나'가 詩作過程에 끊임없이 저 자신을 깎고 덧붙이고 공글려진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시가 완성되었을 때 발화자로서의 '나'는 정작의 '나'이든, 배역(시인이 임의로 창조한 화자)의 '나'이든 말갛게 세면을 하고, 곱게 화장을 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