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시론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김 현 (1942~1990)

최다원 2019. 1. 15. 21:29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김 현 (1942~1990)

●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며 부를 축적하게 하는 수단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고 있다.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이 우리는 문학을 함으로써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한 힘을 알게 된다. 문학은 그 부정적 힘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 문학을 통해 얻은 감동은 대상을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감동이나 혼의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문학으로부터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고 느끼게 된다.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이 대목을 쓰려니까 갑자기 내 의식은 어렸을 때의 어머니의 음성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고구마나 감, 하다못해 동치미라도 먹을거리로 내놓으시고, 나직한 목소리로 당신이 경험한 흥미로운 이야기, 주변 사람들이 겪은 슬픈 이야기, 무서운 동물이나 귀신이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를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하셨다. 그때에 느낀 즐거움, 슬픔, 무서움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감정 밑에 있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주는 쾌감을 내가 얼마나 즐겼던가!

무서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즐기기 위해서 이야기를 듣는다. 이처럼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서 문학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한다. ‘인간은 이래야 행복하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 문학을 위한 문학인가, 인간을 위한 문학인가?

문학은 ‘어떻게 쓰느냐’를 중요시하는, ‘문학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부류와, ‘무엇을 쓰느냐’를 중요시하는, ‘인간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부류로 크게 나뉜다. ‘문학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자율성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하여 문학 자체의 것만을 지키려고 애를 쓰며, ‘인간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효율성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문학적 형식보다는 내용에 힘을 기울인다. 두 부류는 다 같이 문학의 어느 한 면에 과도하게 치우침으로써 문학을 편협하게 본다는 문제가 있다.

문학은 그러나 문학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무지(無知)와의 싸움을,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이나 의미론적인 차원이라는 말 때문에 놀랄 필요는 없다.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즉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문학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진실한 삶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밝혀 준다.

그리고 무의미한 삶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을 추문으로 만든다.

우리는 ‘무지’를 폭넓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이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는 것은,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미디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프랑스 전제(專制) 시대의 왕비를 기억하기 바란다. 그녀는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을 듣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게 아니냐고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문학은 그러한 대답이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히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렇게 좋은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있다니!’ 문학은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 문학은 불가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몽상 속에 잠길 수 있다. 몽상은 억압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몽상은 실재하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은 실현될 수 없는 인간의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드러낸다.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갇혀 버려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내게 시는 너무 써 - 서효인

1.세상은 쓴맛이 난다. 보통의 세계는 보통의 사람에게 늘 고통으로 다가올 뿐이지만, 고통은 당신에게, 그리고 또 당신에게 항상 최고치를 경신한다. 시는 고통의 최고점에서 찍는 발랄한 놀이다. 아픈데 놀다니. 그러니까 변태라는 거다. 변태는 다른 말로 하면 아름다운 취향이다. 예컨대 이런 농담도 가능하겠다. 도저히 인간이 먹을 수 없는 도수의 술을(글라스로) 비워내던 할아버지. 뜨거운 탕에 들어가 시원한 감탄사를 뿜어내는 아버지. 견딜 수 없는 온도의 황토방에서 장시간 연체동물인 듯 유영하시는 어머니 등등.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의 동물들은 공감대를 형성하면 급속도로 친해진다. 술친구와 사우나친구, 찜질방 친구를 보라.

이러한 소소한 생활에서 더 나아간, 그야말로 변태의 취향은 특정인이 아닌 일반 사람에게 있어 참을 수 없이 놀라운 세계가 되어버린다. 놀라움을 정복한 마니아들에게는 취향의 본격적인 형태, 즉 패티쉬 혹은 스토킹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시는 고로 참을 수 없이 놀라운 변태의 아름다운 취향인 것이다. 일단, 자신만의 스타일에 집착하고 탐닉한다(패티쉬). 이단, 일상적 생활을 뒤로 한 채 긴긴 밤을 홀딱 세며 쓴다(스토킹). 삼단, 쓰디쓴 세상을 바라보고 삼키며 뱉어낸다. 똑같은 세상을 더욱 쓰게 느끼는 것. 그래서 결국은 쓰고 마는, 고통을 즐기는 변태적 행위. 미치도록 아름다운 취향.

2.그들은 늘 인상을 쓴다. 즐기지만 아프기 때문이다. 고통의 최고점은 관계에서 온다. 너에게 닿지 못하는 나의 말, 나에게 다가오는 부조리, 혹은 네가 맞닥뜨린 무차별한 폭력. A-Z까지 모조리 시가 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현실이라고 부르자. 모든 시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다시 현실을 호명하는 시는 많지 않다. 쓰디쓴 세상을 구성하는 형태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는 것이 고통의 최고점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믿는다. 꼰대라 불리던 사나이들은 대부분 자기 제자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꼿꼿하게 이름을 외우고 꿋꿋하게 체벌을 가한다. 결국 기억에 남은 선생은 꼰대들이다.

그런고로 시인은 변태적 기질의 꼰대가 되어야 하겠다. 그들은 등교시간 학생들의 옷차림을 살피듯이 천천히 세상을 관찰할 것이다. 덜 모범적인 녀석, 더 이상한 놈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모든 변태가 그렇듯이 말이다. 결핍된 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고, 서로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 행위, 즉 나름의 애무가 시를 쓰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메워지지 않는 상처에 심지 굳은 얼굴로 소독약을 부어주기 위해서는 꼰대가 되어야 한다. 아마 잔뜩 인상을 쓰고 있을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것들과의 치열한 관계를 맺어야 하니까. 자세히 보고 열심히 다독여야(패야!) 하니까. 인상이 써질 수밖에 없다. 구겨진 셔츠처럼 늘 인상을 써야 하는, 시 쓰는 자들의 곤욕.

3.그들의 쓰임은 별로 없다. 자본의 정글에서 가장 청정한 구역에 그들은 존재한다. 너무나 청정하다보니 어지간해서는 팔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팔리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곧 ‘그것들은 쓸모가 없다.’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도통 쓸모없는 일에 얼굴 붉히며 달려드는 이유가 뭔가. 광포한 자본의 무차별한 습격에 맞설 수 있는 자는 결국 쓸모없는 자들이다. 잉여인간들의 반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칸트와 김현의 고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들은 쓸모없기에 무한히 자유롭다. 자유롭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 이 쓸모없고 아름다운 자들에게 자본의 협상력은 지지부진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족속이다. 대체 뭐하자는 거야?

다시 돌려 말하자면 당신이 원한다면 같이 놀자는 것이다. 즐거울 것이다. 하지만 아플지도 모른다. 책임은 질 수 없다. 자본에게도 협상하지 않는데, 읽는 사람과 타협을 하겠는가? 아파도 참고 그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봐주었으면 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천천히 되씹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어렵다고 외면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어려운 놀이일수록 한 번 빠지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기 마련이다.(주위에 득실거리는 야구 폐인들을 보라) 변태 + 꼰대와 재미나게 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하다. 봐주고 들어주고 거기에 고개 끄덕여주는 1人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쓰임이 없어 무심한 척 하는 잉여인간들도 알고 보면 따뜻한 관심은 필수.

4. 변태, 꼰대, 잉여인간으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는 결국 변태와 꼰대와 잉여인간들이 벌이는 한바탕 놀이다. 당연히 규칙을 가지고 있고 참여자가 있으며 잘 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존재한다. 참여자들이 예사로운 사람들이 아니므로 이 놀이 또한 심상치 않을 것이다. 시는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놀이에 익숙한 이들은 전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편안한 방식으로 익숙한 놀이를 하려면 평일 저녁 TV 앞에 앉아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면 그만이다. 전위에서 활개 치는 시들은 그 맛이 된통 쓰다. 시는 되도록 쓴맛으로 존재해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요리사라도 내기 힘든 그런 맛.

그래서 시는 너무 쓰다. 범상치 않은 스타일에 대한 과도한 탐닉과 집착에 혀는 얼얼하고 입술은 따갑다. 타자와 현실을 오래 바라보느라 이마에 주름살은 늘고 머릿수는 없어진다. 자본이 같이 놀아주질 않으니 배는 고프고 가끔은 마음이 서럽다. 하지만 써야 한다. 그것이 재밌기 때문이다. 쓴맛의 재미. 슬픔의 즐거움. 시는 그렇게 존재하고 다시 떠나버린다. 놀이라는 게 그렇듯이 재창조되고 스스로를 갱신한다. 시는 그러니까 만족을 모르는 나쁜 남자(여자)다!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아, 귀신같은 사람.

그러니까, 내게 시는 너무 쓰다. 그래서 쓴다.

감수성 기르는 방법

감수성은 말 그대로 느끼는 능력. 느낌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다.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은 느낌을 강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햇살이 눈부시다’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 한번 중얼거려본다. 그러면 햇빛의 찬란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다음 햇살이 어떻게 환한지 느껴본다. ‘햇살 속에 유리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찌푸린 미간 때문에 눈썹이 다 없어질 것 같네’처럼 그 순간의 느낌을 되풀이해 느껴본다. 이처럼 느낌을 강화하게 되면 감각의 깊이가 생기고 남들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 키우는 방법

우선 어떤 현상,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고정관념에 대해서 네모난 수박에 대해 생각해보자. 둥글다는 본질적인 개념의 파괴, 네모난 틀 속에 갇힌 수박의 아픔을 생각해보자.) 즉 사물을 되도록 새롭게 보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

둘째, 다르게 쓰기의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것인가’라고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쓸 것인가’하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다르게 쓰기 위해서는 다르게 보는 방법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관찰의 세밀함이 필요한 것이다. 다르게 보는 방법을 가지기 위해서는 남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뒤집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뒤집기는 상식을 뒤엎는 질문을 통해 시작한다. 꽃이 아름답다는 고정관념, 똥이 더럽다는 고정관념, 섹스는 추하다라는 고정관념, 밤이 어둡다는 고정관념, 모성애가 숭고하다라는 고정관념, 윤리적인 삶이 바람직하다라는 고정관념. 미추과 선악, 몸과 정신을 뒤바꿔 생각해봐야 한다. 거기에서 인생의 진실이 숨어 있다.

셋째 대상, 사물, 사건에 내 생각의 초점을 맞추지 말고 대상이 주가 되게 써야 한다. 여기에서 사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삐걱거리는 교실의 마루바닥은 종일 얼마나 힘들까, 선풍기는 하루 종일 고개를 흔드느라 얼마나 고단할까. 이것은 사랑의 눈으로 대상을 보는 방법이다. 죽은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면 삼라만상이 다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받아 적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동화와 투사의 방법이자 서정시의 가장 특징적인 동일화의 방법이다.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감동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서 출발한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일, 인간이기에 저지르게 되는 잘못, 용기 없음과 우유부단함, 억눌러도 억눌러도 치솟는 욕망의 모습들을 가감 없이 진솔하게 이야기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뒤집기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활자처럼 꼬물거린다/화장실은/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불경같다/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나는 본다.

- 이대흠, 「이동식 화장실에서」

일상은 관심과 호기심을 빼앗아 낯익음의 세계로 내몰고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굳게 만든다. 고정관념, 상식을 버리고 무조건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숨어 있는 진실이 드러난다. 보편적 진리나 생각, 신념까지도 거꾸로 뒤집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선악, 미추, 대소, 고저, 장단, 청탁 따위의 개념을 반대로 규정해보는 훈련. 역발상은 시적 긴장을 얻는데 효과적이다. 시에서 중요한 구성원리로 작용하는 역설이나 아이러니도 따지고 보면 다 역발상에 기초하고 있다.

관점 바꾸기

뱀을 볼 때마다/소스라치게 놀란다고/말하는 사람들//사람들을 볼 때마다/소스라치게 놀랐을/뱀, 바위, 나무, 하늘//지상 모든/생명들/뭇 생명들/소스라치다

- 함민복, <소스라치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착한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 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는 저녁이었다. 그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을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혼을 울리는 저 따뜻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 정일근, <사과야 미안하다>

의인법 혹은 활유법은 시적 인식의 기본. 비정하고 차가운 마음은 사물과 교감할 수 없다. 따뜻한 시선을 던져야 사물이 자기 자신의 내밀한 세계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나락을 벨 때 벼들이 아프다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죽여야겠다고/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 안도현, <단풍나무 한 그루>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 이성복, <그렇게 속삭이다가>

라. 부끄러움에서 시작하기

비 오시는데/종일/헤어진 여자 허리 생각에 몸 뒤척인다//저기 타는 천리 불꽃/빗발로는/끝내 진화할 수 없는 것인가!//온몸 달아 간절했으니/신체의 한 末端이 타버리는 모양이다/오매 사람 잡네,/이 灼熱感!//점점 골똘해지는 씹 생각에 몸이 다 탄다/날 저물고 비 그쳐 淨口業眞言*/합장하고 千手經 일절 뒤 나무관세음보살……/천 번 입 속으로 읊조렸더니/시끄러운 몸이 겨우 잠든다

* 입으로 지은 업을 맑게 하는 진언

- 장석주, <천리 불꽃>

내 영혼 흠잡을 데 없네. 감기 몸살 안 하고 술 안 먹고 노래방 안 가고, 높새바람에나 깃을 칠까, 착한 내 영혼 누군들 기뻐하지 않으리. 사람들 바로 살게 가르치고, 명절 선물 불편하면 거절할 줄 알고, 수재 의연금 잘 내고, 냈다는 건 마지못해 떨어놓는 내 영혼 참으로 겸손하다. 한때 내 영혼 나쁜 줄만 알았네, 샘 많고 별나고 잘 삐치던 내 영혼, 하지만 이젠 추어탕 집 아줌마도 내 인상 좋다 하니, 자손 대대로 복 받겠네. 착한 내 영혼, 더 늙기 전에 러시아 식 스포츠 마사지 한번 받아봤으면 좋겠네.

- 이성복, <내 영혼 흠잡을 데 없네>

한 번은 옆 침대에 입원한/환자의 오줌을 받아 주어야 했다/환자는 소변기를 갖다대기도 전에 얼굴이 뻘개졌다/덮은 이불 속에서 바지를 내리자/빳빳하게 솟구쳐 있는 그것,/나도 얼굴이 빨개졌다/이불 속에서 소변기를 걸쳐놓고/그것을 잡고 오줌을 눌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말아야 하나... 무안한 눈은/창 밖 벚나무 가지 위로 오르는데/벚나무도 뜨겁게 솟구치는 제 속을 받아내는지/펑펑 눈부신 소리로 꽃을 뿜어냈다/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하게/벌어진 꽃나무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던 햇빛이/후딱 일어나 수천 개의 혀를 내밀더니/내 눈을 휘감아 가버렸다/놀란 나는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벚나무 아래에서 와와, 숨 멎는 소리만/내 눈에 고였다가 넘쳐흘렀다/그날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는 내내 돌아누워/밥도 먹지 않았다

- 강미정, <벚나무>

마. 하찮은 것에서 소중한 것을 길어내기

작은누나가 엄마보고/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한 개 사라 한다./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아버지는 그걸 보고/런닝구를 쭉 쭉 쨌다.//엄마는/와 이카노./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 배한권, <엄마의 런닝구>

어떤 순결한 영혼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심에는 사천 원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단보도 다 건너가는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다' 기어코 돌려주셨다.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다거나 언짢은 기색이 아니었다. 어릴 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 이성복,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결론적으로 평소 사물을 새롭게 보려는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 사물을 볼 때마다 새롭게 대하려는 것은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 보통 부지런하고 자유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전 감각에 탄력성을 주지 않으면 결코 상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새롭게 본다는 것은 ‘연상한다’, ‘비유적으로 본다’는 말과 통한다. 어떤 사물을 보는 순간 또 다른 사물이나 정황을 즉각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사물과 사물, 정황과 정황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고, 여기에 인간의 마음을 맺어줌으로써 이 세상 모든 것이 고립되지 않고 상호교감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연상력이다. 대상을 논리적으로 따지려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즉각적으로 다른 어느 것과 연관시키는 것은 순진무구한 마음이 되어야 가능하다. 과학적 사고를 버리고 시적인 사고를 가져야 하며 감각을 활력 있게 가동시켜 비유적 사고를 해야 한다. 일상인들이 건성으로 스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 어리석은 질문을 스스로 해보고 스스로 답해 봄으로써 신선한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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