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시론

의 시론(詩論) / 문태준

최다원 2019. 1. 22. 19:47

의 시론(詩論) / 문태준

 

비단 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하다오

 

새 시집을 낸 소회를 말하는 것은 큰 소득이 없다. 헛헛한 가슴을 석류를 쪼개 보이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해 시집을 낸 한 지인이 그러길 “나 정말 죽겠어요, 형편 없어요"라고 말하던 게 아마도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되, 그냥 쓸쓸하고 바짝 마른 열매 같고 그렇다.

나는 요즘 집 주변의 들길을 산책하는 데 보람이 있다. 아파트 주변을 살짝 비껴가면 참으로 희한하게 소소한 들길이며 농장이며 숲길이 있다. 그 흙길을 걸어가다보면 저물어 저녁이 되어도 좋다. 그리고 그 인근에 배를 파는 집이 몇 군데 있다. 주인은 올해 배가 달기가 그만이란다. 그러나 나는 배를 파는 작고 주저앉은 그 함석집이 좋다. 멀리 산을 넘어 줄달음쳐 고향집 마루에라도 앉은 기분이 된다. 이런 산책은 마른 가을 갈대 같은 마음자리를 그나마 보살펴준다.

 

2. 요즘은 밥집에서 흰 쌀밥을 받을 때 마치 산에 사는 스님이라도 된 듯 ‘오관게’를 염송하는 버릇이 생겼다. 밥 먹기 전 외우는 오관게는 대충은 이런 내용이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어렵네. 탐진치를 버리고 도업을 이룰지니, 다만 몸이 말라 병들지 않는 약으로 삼아 이 공양을 받네.".

물 한 방울에도 8만 4천 마리의 벌레가 들어 있다는데 어찌 한 그릇 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노고를 잊은 채 사사로이 공양을 받겠는가. 시를 섬기는 것이 오관게를 외우는 자세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시인의 삶이 이처럼 검박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3.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현칙'이라는 스님이 있다. 그 스님이 생전에 쓴 일기가 <산중일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볼 때마다 감흥이 적지 않다. ‘빙판에서 미끄러지다'라는 짧은 글은 세인을 주눅들게 하는 선승의 기개가 있다. 내용인즉 이렇다 “어느 날 밤에 변소에 가다가 얼음에 미끄러져서 펄썩 주저앉았다. 발목이 금방 퉁퉁 붓고 꼼짝할 수가 없어서 업혀 들어가 요강에다 오줌을 누었다. 오줌은 요강으로 해결하더라도 방에서 똥냄새를 피워가며 살 일은 아니다 싶어서 그날부터 먹는 일을 그만두었다. 한 일주일간 지내니 지팡이를 들고 변소에 갈 만하기에 그때부터 다시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곡기를 끊고 지냈다는 문장을 지날 때면 나는 털썩 울고 말게 된다. 이 문장 앞에 내 시도 나도 송수하다. 나는 내 시가 그리고 나의 하루 하루가 너저분한 얼룩을 남기지 않기를 바란다.

 

4. 쏜살같이 내려와 토끼를 채가는 새매처럼 시는 일순에 쏟아져야 한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확,확 터져나오는 그런 것이 전율처럼 올 때를 나는 기다린다. 그게 잘 안되어서 밤 늦도록 전전긍긍하는 때가 많다. 큰 재주가 없다는 뜻일게다. 삶과 시의 터전이 영 시원찮다는 뜻일게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고만고만하다는 뜻일게다. 큰 재주가 없으면 오래 오래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기다리다보면 나는 또 송수하다. 대체로 나는 사상이나 모랄 같은 것이 전면에 드러나는 시가 좋기만 한 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자처럼 거느리는 배경이 있는 시를 좋아하는 게 내 시의 취향인가보다.

 

5. ‘무상無常'과 ‘공空'을 생각할 때가 많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나도 변하고, 변하는 내가 본 세상도 끊임없이 바뀐다는 이 말이 좋다. 또,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我'라고 말할 게 없다는 사실도 나는 흔쾌히 수긍한다. 이 세상에 목숨을 받아 와서 머무르고 변화하다 결국 소멸하는 이 사연을 어쩔 것인가. 죽어 ‘중음中蔭'에 머무르다 다시 환생하는 이 목숨의 순환을 어쩔 것인가. ‘我'아'라 고집할 게 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두 손으로 곱게 받을 때가 많다. ‘입아아입入我我入'이라는 걸 뼈에 새긴다. 그러나 시가 사상이나 모랄 그 자체이어서는 곤란하므로 이런 것들을 시의 몸에다 한 벌의 옷처럼 입혀보기도 하지만, 소출은 적다.

 

중국 가상대사 길장 스님은 죽음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다. “이(齒)를 가지고 털을 품은 자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삶에서 죽음이 온다. 내가 만약 태어나지 않았다면 무엇에서 죽음이 있겠는가? 마땅히 처음에 태어남을 보고, 마침내 죽음이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삶에 울고 죽음을 두려워 말라”. 죽음에 익숙해야 한다. 그럴 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노래하고 곡(哭)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라는 말의 숨결을 나는 좋아한다. 이것과 저것의 틈. 그 틈을 내력을 구멍을 들여다보길 좋아한다. 그 틈에는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외로운 방 같은 ‘사이'라는 말이 단풍처럼 곱다.

 

6. 불교의 수행자들은 같은 나무 아래 여러 날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마저 애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단다. 다르게 이해하면 ‘걸식의 정신'이라 부를만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두려울 때가 많다. 한 곳에 머물러 이내 일상과 혼백이 부패하리라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 시업도 삶도 웅덩이의 물처럼 고이게 될까 두렵다. 이런 걱정은 족쇄처럼 내 발목을 잡고 있어 끝내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7. 조선시대를 통틀어 몇 안되는 전업시인 가운데 한 분인 이달은 나그네 생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시를 썼다고 한다. 나는 이달의 시 가운데 ‘강을 따라서'를 좋아한다. 시는 이렇다. “강변 십리 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꽃잎 속을 뚫고 가니 말발굽도 향기롭다//산천을 부질없이 오고간다는 말 마소/

 

비단 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하다오//".

시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달은 객지생활의 고달픔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나도 시로 나의 누추한 생활을 견딘다. 견디어 견디어 사라질 것이다. 시를 뜨거운 한 그릇의 쌀밥으로 섬길 것이다. “비단 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하다오". 이 얼마나 부러운 소식인가.

 

명상과 시//장석주

 

시를 쓰는 자들이 “비가 온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본디 비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람의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있어온 현상이다. 비는 언제나 있다. 그것은 오고 가지 않는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도 비라는 현상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주체로 고정시키고 사물들을 객체화하는 인간 중심의 오래된 인습이 비를 제 몸 가까이 끌어당겨 “비가 온다.”라고 쓰게 한다. 국소적 공간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만이 “비가 온다.”고 쓴다.

좋은 시인은 “비가 온다.”라고 쓰지 않는다. 제 몸의 경험을 받들어 이렇게 쓴다.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주용일, 「봄비」)

 

“나무에서 나오는 방법은 나무를 통하는 길뿐이다.”(프랑시스 퐁쥬)

명상은 인습적 관념의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명상은 시의 반숙(半熟)이다. 그럼 완숙은 어떤 경지일까 ? 열반(涅槃). 하나의 현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순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 시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짓이다. 시는 우주의 데이터 베이스를 훔치는 짓이다. 플라톤이 역정을 내며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모조리 추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화국에서 시인들은 파렴치한 자들이라고 낙인찍힌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1964년에 소비에뜨 공화국의 법정은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인 브로드스키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지 않는 기생충”이라고 규정지었다. 그 법정에서 있었던 심문 내용의 일부를 보자. 판사 : 당신은 누구인가 ? 브로드스키 : 나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판사 : ‘~ 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허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 브로드스키 : 나는 시를 쓴다. 출판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판사 : 당신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라. 브로드스키 : 나는 시를 썼다. 그것이 내 일이다.

 

판사 : 당신을 시인으로 공인한 것은 누구인가 ? 브로드스키 : 없다. 그것은 나를 인간으로 공인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판사 : 소비에뜨에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왜 일을 하지 않았는가. 브로드스키 : 나는 일을 했다. 시가 나의 일이다. 나는 시인이다. 결국 브로드스키는 공화국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브로드스키의 재판은 시의 DNA가 생물학적 합목적성과 무관하며 공익적 세계의 건설에 기여하는 바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B.C. 322)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시학』에서 “시인들에 대한 비난은 다음의 다섯 종류, 즉 불가능, 불합리, 도덕적으로 해로운 요소, 모순, 시 창작 기술의 올바른 기준에 반하는 것 등으로 구분된다.”고 쓰고 있다. 시, 무용한 짓. 상상임신. 옐로카드를 받는 헐리우드 액션.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의지와 표상 사이에 있다,고 선언했다. 베르그송은 그것이 생의 비약이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시의 미학적 선택에 내재한 반도덕성, 무용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명상은 초언어를 지향한다. 초언어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는 태허(太虛)의 상태다. 가령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 / 너, 가련한 육체여 / 살 것 같으니 술 생각 나냐?”(김형영, 「일기」).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뒤 비어서 가뿐한 몸에서 태허를 겪는다.

 

명상은 그 태허의 상태에서 사물들의 저편에 숨은 신을 만나는 일이다. 숨은 신은 죽은 고양이다. 어느 선사에게 물었다. ―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 선사가 대답했다. ― 죽은 고양이다. “국도 한 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 죽은 고양이의 / 저 망가진 외출복 !”(이창기 「봄과 고양이」)

명상과 시는 그 계통분류상 다른 가지에 속해 있다. 하지만 명상과 시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명상에서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시의 영감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뇌속에서 부화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 아니었음, 침묵도 아니었어, /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 밤의 가지에서, /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 격렬한 불 속에서 불러어, / 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에 / 얼굴 없이 있는 나를 / 그건 건드리더군.”(파블로 네루다, 「시」)

 

사람들은 깨달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한다. 일본 불교의 한 맥인 본각사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이미 깨달았으니 다른 좌선도 필요 없고,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다. 조악무애(造惡無礙)의 뿌리가 본각사상이다. 도겐(道元, 1200 ~ 1253)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던 승려다. 도겐은 수행의 결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게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을 향한 지향이 있을 뿐이다.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되 궁극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프랑시스 퐁쥬는 새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새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도 그 중의 일부다. 그러나 새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활강하지만, 프랑시스 퐁쥬가 원할 때 그의 시 속으로 날아들지는 않는다.

 

시는 언어를 딛고 언어를 넘어간다.

시는 없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있을뿐이다.

시와 명상은 다 함께 초언어(超言語)를 지향하지만 시는 방법적 도구로 언어를 쓴다. 언어는 물(物)을 지시하는 기호다. 언어는 물이 아니다. 언어는 관념이다. 언어는 나와 물 사이에 있다. 언어는 나와 세계,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쳐진 다리다.

시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론적 연관의 장(場)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만나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들에 메아리치고 있는 비언어적인 울림 속에서다.

 

시는 언어가 아니다.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그 여백에서 아직 형태소(形態素)를 얻지 못한 생성하는 언어, 발효하는 언어다.

시는 의미가 아니다. 의미 이전이다. 이를테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혹은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김기택, 「얼룩」)와 같은 구절들은 시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미의 잠재태(潛在態)임을 말해준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모든 작가들이 바로 나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인들이 바로 나다. 또 나는 내가 갔던 모든 도시이기도 하며 내 모든 조상이기도 하다.”

 

거울과 부성(父性)은 시와 상극이다. 다시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마치 그것을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거울의 뒷면, 그 텅 빈 공허를 본다. “내가 보는 것은 늘 청동거울의 뒷면이다”(조용미, 「청동거울의 뒷면」)

의미로서의 시는 사물로서의 시보다 하급이다. B급이다. 하이쿠는 17자로 끝난다. 의미가 언어의 양에 비례한다면 하이쿠는 가장 무의미한 언어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는 대개는 언어와 반비례한다. 하이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시 형식 중에서 가장 슬림하다. 하이쿠는 해석의 언어가 아니다. 사물과 만나는 순간의 아주 희미한 떨림을 기록한다. 그것은 아직 시로 진화하기 이전의 원시적 흔적이다.

 

하이쿠에서 언어에 대한 근검절약은 의미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진다. 가장 성공한 하이쿠는 무의미의 의미를 체현해낸다. 하이쿠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을 겨냥한다. 하이쿠는 오류와 우연들에 필연의 에너지를 수혈하는 선(禪)과 명상에 가깝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 하나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쉼보르스카, 「두 번이란 없다」)

명상은 사물의 계통분류상 속(屬)이고 시는 그 하위에 속하는 종(種)이다. 명상은 유실수고, 시는 앵두나무다.

 

하나밖에 없다 - 천양희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 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