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시론

시에 대한 몇가지 편견

최다원 2019. 3. 5. 19:46

시에 대한 몇가지 편견

 

이성복

 

우리는 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손이 분명히 해보다 작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으므로 ‘해보다 손이 크다’라는 착각을 한다. 시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 중에 하나가 비유가 많으면 시적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영화 "LONG SHIP"에서 잃어버린 황금종을 찾아 3년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종이 있다고 하는 하얀 섬에 도달했을 때, 결국 거기서 발견한 것은 그 "섬 전체가 종"이란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시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비유의 비유, 시 자체가 비유인 경우다. 김소월의 시에 무슨 비유가 있는가. 하지만 소월의 시는 한 편의 시 자체가 곧 비유이다. 씨리한(?) 비유를 쓸 바엔 쓰지 말아야 한다. 현실 자체가 황금종이며 이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곧 예술가이다. 시적인 수필을 쓰지 마라.

 

또 ‘체험을 많이 하면 좋은 시를 쓸 것이다, 감정이 풍부하면 더 좋은 시를 쓸 것이다’ 라는 편견이 있다. 시의 3요소는 작가, 대상, 언어인데 시가 시를 쓰는 사람 아래 있다는 착각을 갖는다. 말하자면 시인의 체험과 감정에 의해 좋은 시가 탄생한다는 것. 착각이다. 그러면 대상이 우위인가? 대나무를 바라보다 병이 났다는 왕양명의 "格物致知" 일화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곧 좋은 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시는 절대적으로 말에 있다. 말라르메도 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말’이라고 했다. 말에는 온갖 현실의 오물이 묻어있다. 그러므로 말을 제대로 따라가면 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말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말은 내시경이다. 이를 통해 ‘緣起’를 따라 간다. 말을 통한 발견이 필요하다. 시에서 웅변은 가장 저급한 것이다. 눌변이 좋다. 시에서는 말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곧 말장난이다. 그러나 많이 드러난 말장난은 안 좋다. 말장난이긴 하지만 의미 있는 말장난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 시보다는 시작 노트가 더 좋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작 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시를 쓴다는 의식 아래 시를 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좋은 시를 쓸 수가 없다. 녹차는 첫물을 걸러 내고난 뒤 두 번째가 가장 맛있다. 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가 된다. 골프는 ‘힘 빼는데 3년’이라고 한다. 테니스도 어깨와 손목에 힘을 빼야 원샷을 할 수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말이 움직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시작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실제로 김종삼 시인의 <시작노트>라는 시는 그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가장 아름답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사물을 묘사할 때는 명함판 사진을 그리려 하지 말고 스냅사진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 스냅 사진이야 말로 한 순간 속에 "영원"이 들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명함판으로 봐서야 무슨 애틋한 느낌이 들겠나. 명함판 사진은 공적인 차원의 사회적 가면이다. 명함판이 가장 비시적이다. 로댕은 손의 표정을 기막히게 표현해내는 조각가인데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가 그런 작업을 한 것은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만 손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외국 명문 극단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연습을 하는 것은 손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그런 차원에서 글을 쓸 때 문어로 쓰지 말고 구어를 써라. 밥해놓고 3일 지난 게 문어다. 구어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언어의 생생한 리듬이 있다. (베토벤의 일화; ‘내가 돈이 어디 있나, 이 사람아~ (♩♬♩)’ 이 가락이 유명한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시 쓸 때 말을 혀로 굴려볼 필요가 있다. ‘얼굴’이라는 말보다는 ‘상판떼기’가 훨씬 실감나지 않는가. 비어, 속어, 사투리, 은어는 시어의 보고이며, 구어는 곧 활어이다.

자신이 지금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라. 피아노 소리는 피아니스트의 어깨를 보면 알 수 있다. 완전히 풀려야 한다. 힘을 빼려고 하면 더 힘이 들어간다. 잡생각을 지우려면 다른 걸 채워야 한다.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비우려면 채워야 한다. 자신에게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에게 하듯이, 기도하듯이 말을 하라. 결국 머리가 몸을 뻣뻣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들은 모든 예술에 통한다. 예술에 통하는 것은 곧 스포츠에 통한다. 곧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과 말 사이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 여태천

 

말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장 혼란스럽고 저속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종종 시에서 아름답고 매력적인 말은 어느 순간 길을 잃기도 하고, 엉뚱한 길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한다. 가끔 너무나 많은 가상(假像)을 가지고 있는 이 말들을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니 이 말들이 진실한 세계를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말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런데 정말로 말은 우연에서, 그리고 우연으로만 끝나는가. 말의 우연성과 불안정을 극복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물론 시가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무엇(말하자면 이데아, 절대 정신, 혹은 물자체와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의 역사를 온전히 다 기록할 수도 없다. 미미한 우리의 정신(예컨대 시에서 일인칭 화자)이 온전하게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빈약한 우리의 말(시어)이 어떻게 그것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곧 진리라는 헛된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신 그 기록은 수없이 많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일(가령, 순간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발견하는)이 생길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있다. 단언하건대, 시란 수없이 많은 그 기록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시가 형이상학처럼 본질적인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언어(말)를 아직도 그렇게 여기는 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몇몇 음성주의자들의 후예들이 그렇다). 그러나 시란 우리의 말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특별히 의미론적으로 설명해주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그 쪽이라면 오히려 소설이 적당하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부터 그것이 ‘시’라고 고집하는 이들은 대체로 시에서 말의 가치를 잘 모르는 편에 속했다.

 

말이 곧 진리와 같다는 인식론에서 비롯된 미학적 자기중심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심과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이때, 말의 주체(시에서 일인칭 화자)뿐만 아니라 말이 겨냥하는 한없이 무거운 의미(시의 주제)는 그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중심적 지위를 잃게 된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 그 해답은 역시 말에 있다. 그 말은 역사적인 것 속에서 시적인 것을, 순간적인 것 속에서 영원한 것을 추출한다. 물론 모든 말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게 시인은 세계의 존재를 말로 옮겨서 우리 앞에 환하게 밝힌다. 독일의 비극적 시인 횔덜린(F. Hölderlin, 1770~1843)은 그 말을 모든 자산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자산이며, 시인만이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말로 세계의 존재를 환하게 밝히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다. 시인은 가장 직접적인 현실과 과감하게 맞서서 현실로부터 존재의 영원한 의미를 드러내 보이는 말의 세계를 만든다. 오직 순수하게 말의 세계에 빠졌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S. Mallarmé 1842~1898)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일종의 시각적 ‘휴지(休止)’로 이용하여 말과 이미지의 리듬감 있는 운동감을 창출한 바 있다. 역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휴지의 가치는 시각적인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말과 말 사이의 침묵, 곧 청각적 부정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와 침묵이 이러저러하게 교체될 때 시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천둥이 칠 때 우리가 듣는 것은 순수한 천둥 그 자체가 아니다. 정적을 깨고 그 정적과 대비되는 순간을 천둥으로 듣는 것이다. 말과 말 사이에 있는 침묵이 중요하고, 침묵과 침묵 사이에 있는 말의 움직임이 소중하다.

 

그러므로 말라르메가 창조한 이 공백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데 있다. 시각적 휴지는 일종의 사유에 뚫려 있는 구멍과 같다. 좀더 확대하자면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에서의 의도적 단절이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발화를 둘러싸고 있는 침묵이다. 이 침묵 저 아래로 늘 말이 움직인다. 실제로 시의 구조는 감추어져 있지만 말과 말이 만드는 공백 속에, 말이 환기하는 어떤 것으로 현존한다. 그것을 읽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짐작하는 의미와 시에 사용된 말 사이에서 어긋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울림이 생긴다. 그 울림이 바로 시의 이미지고 비유다. 시인은 이미지들과 비유의 테크닉에 의해, 또는 말들이 만드는 소리의 조화에 의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말에 대한 이성의 동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령,

 

당신이 처음으로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그 아래 어디선가 나는 유리 넥타이를 매고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을 것인데, 당신은

―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에서, ‘내’가 “유리 넥타이를 매고 / 조용히 앉아” 읽고 있는 바로 그 “책”은 이성의 동의가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 ‘내’가 읽고 있는 “책”과 상관없이 “당신”은 있다. ‘나’는 “당신”을 이성의 질서인 “책”에서, “책”이 안내하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만났다. 하지만 “당신”은 “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세계에 무수히 많은 “당신”으로 산다. 비약하자면 여기서 “당신”은 “책” 속의 “루시”이자, 도널드 요한슨이 1974년 11월 30일 아프리카 하다르의 아와시 강가에서 발견한 인류 최초의 화석이다. “당신”은 320만 년 전에 살았던 25세의 여성으로 키는 약 1백7cm 몸무게는 28kg 정도에 불과한 여자다. 동시에 그녀는 비틀즈가 부른 아름다운 노래며, 그 노랫말이 만드는 슬픈 리듬이다. 노래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사랑하는 여인이며, 노래가 생기기 전에 반짝였던 먼 우주의 어느 별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다. 말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것들이 갖는 의미에 의해 가치를 가지며, 그 다음에 말들의 환기력과 울림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말한 비은폐성(非隱蔽性 alētheia)은 사물과 작품, 진리, 예술이 모두 비은폐성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시란 언어가 환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당신”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낸다. 그 드러남은 그 자체로 우주적인 한 현상(사건 Ereignis)이며 낡은 관념의 피라미드에 비치된 어떤 해설이나 주석보다 투명하고 예리하게 우주의 한 면모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그 드러남 속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하다. 비은폐성과 은폐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비약이란 이와 같은 존재의 본질을 환기하는 말의 특성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성에서 해방될 때, 말은 거칠어지기도 하지만 비로소 매우 강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란 뭔가를 환기하고 충동질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사물이 아닌 그것이 빚어내는 효과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암시와 환기는 독자가 자신의 심상과 연상을 가지고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오직 존재하는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 말과 만나 만드는 세계, 시란 바로 그것이다.

 

죽지 않은 꽃들은 쉬지 않고 빨리 자라

하늘의 별에 닿았지, 책에 그렇게 적혀있어도

나는 어둡고 검은 눈으로 한 자씩 손을 짚어가며

새끼를 낳는다는 해변의 나무와 죽은쥐나무와

날카로운 발톱의 짐승들

있지도 않은 이름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고

또 읽고 있을지도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당신”이라는 “루시” 때문에, 노래 때문에, 사랑 때문에, 아름다움 때문에 ‘나’는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다. 역으로 “책”을 읽으면서 “죽지 않은 꽃들”과 “새끼를 낳는다는 해변의 나무와 죽은쥐나무와 / 날카로운 발톱의 짐승들”을 상상한다. 그것은 모두 “있지도 않은 이름”들이다. 우리는 산문의 말로는 이성의 범위와 깊이를 벗어난 느낌을 표현할 수 없다. 말은 그 극한으로 갈 수 없지만 가려고 한다. 말의 구조가 도달할 수 없는 극한에 이르고자 하는 끝없는 방황의 연속이 인간의 삶 그 자체다. 아니 인간의 목적이 태어나면서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말로 극한의 상태를 묘사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말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말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다. 말이란 인간을 떠나면 더 이상 말일 수 없다. 그러나 일상어와 일상어 아닌 것 사이의 간극, 그 간극에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간극이 어쩌면 현대성일 수도 있다. 말의 바깥에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 세계가 있다.

 

말과 말 사이를 메우는 것은 신이 사라진 상황에서 은폐된 채로 있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찾는 일이다. 말과 말 사이는 ‘나’가 가고 오는 그 사이다. 이 사이는 시간의 사이이기도 하다. 또 그 사이에 모든 존재가 있으며, 사건이 있다.

 

복숭아 향기 나는 오렌지색 이층버스를 타고

인공의 구릉과 호수를 건너

당신이 거닐었던 검은 땅으로

비행기, 버스, 밤하늘, 다이아몬드

내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이 새로운 단어들의 감촉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루시,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시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이행 지점이다. 이 사이에 때로 역사가 들어앉기도 한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이 새로운 단어들”이 그 사이에 가득하다. 그래서 잠정적이고 흘러가는 영역을 가로질러 영원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들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그 사이에 난 길을 걸어본 이가 아무도 없다. 그 길을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하지만, 우리는 단번에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비약할 수 있다. 시인이 종종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런 일을 한다. 그때 말이 지니는 가장 순수한 의미가 진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인상들을 기록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 이정하

 

어디까지 걸어야 내 그리움의 끝에 닿을 것인지

걸어서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밤새도록이라도 걷겠지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버리고 나는 마냥 걷기만 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도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고

마치 먼 나라에 간 이방인처럼 고개 떨구고

정처없이 밤길을 걷기만 했습니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지만

짧은 이별일지라도 나는 못내 서럽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큰 하나,

이미 버스는 끊기고 돌아갈 길 멉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걸어서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대의 마음으로 갈 수 있는 토큰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부르튼 발은 상관도 않을 겁니다.

문득 눈물처럼 떨어지는 빗방울,

그때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아 난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온 몸이 포싹 젖은 걸로 보아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