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시론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최다원 2019. 3. 12. 19:26

시를 쉽게 쓰는 요령 - 김영남

 

11.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누가 필자에게 시창작 과정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두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아마 상상력과 퇴고력을 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시의 내용을 상상력이 좌우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퇴고력이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상상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퇴고를 잘 하면 그 시는 크게 흠이 드러나지 않고, 또한 퇴고가 좀 어설프더라도 상상력이 특출하면 이 시 또한 큰 문제점이 노출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소에 문제가 있을 땐 정말 작품이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죠. 하여,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상상력과 퇴고력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하면 작품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퇴고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 또한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 강좌를 대신할까 합니다.

 

* 상상을 할 때는 뜨겁게, 퇴고를 할 때는 냉정하게

 

상상을 할 때 마음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뜨겁고 깊게 해야 하지만, 퇴고를 할 때 마음의 자세는 이와 정반대 자세인 냉정하고 넓게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와 작품을 고칠 때에는 정 반대의 심성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을 바로 써서 완성시키면 흥분된 감정상태에 있기 때문 시도 흥분되어서 좋은 시 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보자 시절에는 시를 써서 곧바로 완성시키고 누구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게 초보자 시절에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힘들여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더디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퇴고기간은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필자의 경험을 말하자면 퇴고는 오래할수록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아무리 짧은 시라도 곧바로 써 바로 완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현재도 시 한 편을 구상해서 남에게 보여줄 정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보름 이상의 퇴고기간을 갖습니다. 그러니깐 필자의 경우 상상은 한두 시간에 깊고 뜨겁게 해서 서랍에 두었다가 2-3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꺼내 이 시에 새로운 상상을 조금씩 덧붙이고 삭제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래야 내용이 흥분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고, 시에 침착성과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퇴고와 관련해 시를 효과적으로 다듬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 정신이 가장 맑은 시간에 퇴고하라.

 

필자는 퇴고를 위해 정신이 가장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아주 자주 가졌습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자주 가진 이유는 아무리 맑은 정신상태라 하더라도 그 분위기에 또 오랫동안 잠기게 되면 이 또한 마음이 흥분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여 필자는 아침에 맨 처음 가는 화장실을 시 퇴고 장소로 아주 잘 이용하였습니다. 2-3일전에 쓴 시 초고를 갖고 네모난 밀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읽으면 정말 시의 어수룩한 부분, 미흡한 부분, 참신하지 못한 부분 등이 눈에 잘 띄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이 상태에서 지적된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고치고 그랬습니다. 하여 게시판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신이 가장 맑고 평온한 상태가 어느 순간인지를 확인해 퇴고를 할 때 이를 자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라.

마지막 퇴고와 관련해 이와 같은 정신, 즉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이의 지적을 빨리 받아들일 줄 알며, 아끼는 작품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마음 자세의 확보가 중요해서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 자기 동료들의 작품평과 훈수를 귀담아들으면 망하는 길로 가는데 첩경이라는 걸 명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여줄 땐 가능한 한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시를 쓴 경력이 충분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시를 잘 쓸 줄 모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를 볼 줄 아는 안목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제목을 효과적으로 잘 붙이는 요령

 

시의 제목을 제대로 붙일 줄 알려면 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편의 시가 성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또 독자들이 이 시를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제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이 문제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그동안 시 창작에 응용한 사람이 의외로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가 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같은 제목을 붙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제목이 되고, 보다 생산적인 제목이 될 수 있을까? 필자가 그 방법을 개발해서 그동안 작품에 실제로 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써 놓고 제목을 <화장실>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논문, 일반 문서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제일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는 이걸 제대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시들이 제목을 <화장실>로 해놓고 화장실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쓰거나, <서울역> 해놓고 서울역에 관하여 온갖 수사와 기교를 동원해 시를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화장실과 서울역에 대한 정보를 이미 많이 갖고 있어서(어쩌면 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름) 그 시를 쓴 사람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의 화장실과 서울역에 관한 시는 읽으려 하지 않고 쉽게 외면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자는 정말 열심히 최고로 좋은 시를 썼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작자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화장실>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 화장실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모습의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롭게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어야 그 시를 읽어줄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시로 성공한 작품들을 한번 예로 몇 들어볼까요? 김춘수의 <꽃>, 김수영의 <풀>.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등을 한번 봅시다. 내가 불러줄 때 내게로 와 핀 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평역이란 시를 보기 전에 사평역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사평역을 목포역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도 이 시의 감동이 사평역만큼 올까요?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화장실>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위와 같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때 효과적인 제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 두 번째 방법은, 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센텐스, 키 센텐스를 제목으로 올리되 전체 내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으로 필자의 시집 정동진역을 읽어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필자가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은 평소 광고 카피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즉 기사와 광고 카피의 헤드라인이란 시로 여기면 제목에 해당하는데 이걸 잘 뽑느냐 잘 못 뽑느냐에 따라 그 기사 또는 광고의 첫 인상 뿐만 아니라 여운까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이 그 카피,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라는 것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시에 한번 적용해봤더니 제대로 맞아떨어지더군요. 이때 붙이는 제목의 형식은 서술형이 되기 쉽고, 내용은 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시 내용중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의 속성을 가진 전혀 엉뚱한 것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법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자면 화장실 내용으로 시를 쭉 써놓고 제목을 <김영남>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김영남은 화장실이다" 라는 시를 쓴 거가 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글을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묘사 해놓고 제목을 <아름다운 섬>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쭉 묘사해 놓고 제목을 <아름다운 여자>로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 글이 아름다운 여자를 설명하고 묘사한 글이지 어떻게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목을 <아름다운 섬>이라고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시가 되고 안 되고 까지 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시를 하나 소개하고 지면상 한계로 인해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요령>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소개하는 시는 98년(?) 현대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이고 아주 하찮은 여울을 하나 묘사해 놓고 제목을 엉뚱하게 붙여 성공한 시입니다. 만약 이 시 제목을 < XXX 여울>.로 붙였을 경우 시가 될 수 있는지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춘기 /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침묵하는 연인의 홍조와 열망 - 김백겸

 

순수의 전조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지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이 시를 처음 읽고 가슴이 뛰었던 생각이 납니다. 큰 세계를 이토록 짧은 시안에 표현한 시를 전에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또 하나는 시로서 시 밖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시(禪詩)가 언어와 사건의 역설과 어긋남을 통해 생각 밖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비해 이 시는 언어와 사건이 어긋나지 않고도 유추와 상징으로 무한세계를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이어서 이런 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익숙하게 보던 개념들과 언어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이 이 시를 보고 느낄 당황함이 생각납니다.

 

언어

 

시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언어들에는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감각과 경험의 내용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달라붙다’는 의미에는 ‘배워서 익혔다’는 뜻과 한 단어에 여러 경험과 감각이 동시에 매달려 있어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본 ‘들꽃’(쑥부쟁이나 수선화나 개망초의 경험이 다르겠지요)과 자기가 배운 “천국”(기독교인의 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천국이 다를겁니다)으로 이 시를 이해할겁니다. 생각이 주로 언어라는 상징체계로 구성되는 데 비해 의식은 언어에 느낌과 감정을 포함한 보다 큰 범위입니다. 언어로 보는 그림보다 의식은 보다 큰 세계지도를 보고 있습니다. 세계(世界)란 인간의식이 파악한 시간과 공간의 그림입니다.

우리 각자가 본 세계지도의 크기는 대소(大小)와 고저(高低)와 형태가 매우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무의식입니다. 우리 뇌를 관찰한 결과 뇌는 자원의 5%를 의식활동에 무의식활동에 95%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프로이드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래 무의식을 더 연구한 칼 융은 무의식이 계층구조(Persona, Shadow, Anima, Self)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신의 소여구조인 원형(Archetype)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세계인식은 의식이 본 그림에 추사해서 선명하진 않지만 보다 큰 그림을 배후에 두고 있습니다. 시는 이런 무의식의 그림까지를 포함해서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하면 상징인 언어가 담당할 수 있는 용량은 인간 마음의 약 1% 정도라고 유추가 되는군요. 1%의 상징 언어는 글자를 포함한 도형, 기호, 색채, 음악 등 여러 형식이 있습니다. 글자를 주로 해서 마음이 본 세계(世界) 전체를 표현하는 시는 그래서 유추와 은유를 통한 암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시를 쓰는 일은 조금 과장해서 바늘귀를 지나가는 낙타의 수고로움과 비견할 만 합니다.

 

유추(Analogy)와 은유(Metaphor)

 

유추와 은유는 복잡한 현상들 사이에서 내적 관련성이나 기능적 유사성을 알아내는 정신작용입니다. 패턴이 같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같은 개념의 범주로 파악하는 거죠. 과학은 유추와 은유가 비논리적이라서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추와 은유는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에 알려진 것과 경험에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상상의 도약으로 새로운 세계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창조적 상상력이란 두 사물간의 숨겨진 관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 알의 모래”는 저희가 흔히 경험하는 사물입니다. 초등학생과 어린아이도 모래는 잘 이해하죠. 오히려 모래를 가지고 장난하는 놀이를 읽어버린 어른보다 더 생생하게 이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계(世界) 즉 인간이 경험한 시간과 공간의 크기(기억과 교육으로 전승된 인류가 경험한 시간과 공간 내의 모든 사물로 확장할 수도 있겠네요)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유추했습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저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자신이 본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살려 블레이크의 유추로부터 새로운 유추를 감행합니다. 유추의 유추는 고급정신기능입니다. 창조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지요. 저는 고급 독자로 하여금 이런 생각의 도약을 하도록 암시한 블레이크가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레이크가 예시한 공간 안의 사물들 “한 알의 모래”와 “한 송이 들꽃”과 “손바닥”은 모두가 낡고 부서지는 존재들입니다.

 

이 일회적인 존재의 가엾음에서 유추한 “세계”와 “천국”과 “무한”은 녹슬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황금’으로서의 세계전체를 암시합니다. 블레이크는 개별적인 사물에 깃든 전체로서의 일자(一者)를 드러냄으로서 ‘낡고 부서지는 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의 일부임을 드러냈습니다. 강력한 은유는 인간의 경험에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드러낼 때 이루어집니다. 훌륭한 은유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닌 최대의 지혜와 집중력을 요구하죠. 물론 독자에게도 동일한 크기의 상상을 강요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안의 모든 사물이 빅뱅 후 ‘초 에너지’가 식으면서 디자인 됐다고 말합니다. 중력과 강력과 약력, 그리고 전자기력이 나타난 후 서로의 상관관계로 시공간과 물질이 디자인 됩니다. 태초의 재료가 모두 같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런 직관은 인도의 ‘우파니샤드’나 ‘불경’에 있는 사상들입니다. 서양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의 사유와 ‘영지주의’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시적 직관은 자신이 본 눈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 언어로 이를 표현해 냈습니다.

 

감정이입(Mirroring & Empathy)

 

뇌 과학자들이 재미있는 결과를 밝혀냈습니다. 원숭이가 땅콩을 집어 먹는 순간에 이 동작을 보던 다른 원숭이의 뇌도 동일한 흥분이 일어나는 뉴런집단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이 타인의 정서를 이해하는 신경기전이 밝혀졌습니다. 타인이 매를 맞는 장면을 보고 내가 매를 맞는 것처럼 고통을 느낍니다(물론 강도는 차이가 있겠지요). 영화나 연극을 보는 관객이 주인공이 되서 스토리에 몰입하는 내부가상 현실시뮬레이션을 과학자들은 미러링(Mirroring)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타인에 대한 행동모방능력은 진화상 5만 년 전 쯤에 폭발적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집단생활이 중요해지면서 타인에 대한 모방능력이 문화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됐다고 해석합니다. 이 능력이 손상된 자폐아와 정신분열자들은 심각한 사회부적응장애를 나타냅니다.

모든 예술은 감정이입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합니다. 작가의 정서(타인의 정서)를 이해할 수 없으면 그 작품의 내용은 전달이 될 수 없습니다. 칼 포퍼는 새로운 이해를 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으로 감정이입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감정이입이란 ‘문제 속으로 들어가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입의 가장 친숙한 경우가 인간의 사랑인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일부가 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육체적으로 한몸이 되는 에로스와 정신적으로 한 몸이 되는 ‘아가페’의 형식이 생각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시(Poesie)’와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그 감정이입의 형식이 에로스와 아가페를 취하는 것은 개인의 스타일이지만 사물에 대한 깊은 공감능력-사랑이 필요합니다. 무용가 이사도라 던칸은 무용이 사람의 몸 속에 감정이입기제를 자극하여 ‘관객이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란 시를 읽은 독자가 시인이 느낀 포에지의 세계를 스스로 시인이 되어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시인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시 창작의 요체입니다.

 

열정(Passion)

 

이 단어를 단순히 배웠을 때는 영한번역으로 열정, 격노, 욕망을 의미하는 심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술은 특히 열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열정(Passion)이야말로 시창작의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제목을 보고 ‘Passion’이 ‘수난(受難)’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식을 면했습니다. 기표 하나에 다중 의미는 이미 알려진 언어이론이지만 저는 열정과 수난이 한 몸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는 종교적 열정이 지나친 분이었지요. 당대의 보수이데올로기인 유대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혁명적인 종교사상을 퍼뜨려 집권층의 반감을 샀습니다. 예로부터 권력은 체제 위협자를 반역이라는 누명을 씌워 삼족을 멸했지요. 신의 소명과는 상관없이 객관적 상황으로 보건대 예수의 수난은 예고된 수순이었습니다.

시도 종교적 열정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시인(예술가)은 자신의 열정에 의해 기존 문화가치가 찬양하는 예술형식을 새롭게 전복하려고 합니다. 혁명가는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수난을 당합니다. 혁명적인 작품을 창작했으나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수난을 당한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화가로서는 고흐가 대표적이지만 「순수의 전조」를 쓴 블레이크도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종교적인 신비를 주제로 시를 많이 썼는데 기존의 기독교 교리해석을 뛰어 넘는 작품이 많았습니다. 사회적인 불이익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기존의 사물인식을 전복하려는 이유는 심혼의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Passion’은 축복과 저주의 양가감정을 가진 말입니다.

 

은폐

 

사랑에 빠진 영혼은 그 열정을 감출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열정을 감추고자 할 때 눈은 대상을 직접보지 못하고 눈길을 아래로 향하게 합니다. 발화하지 못한 정념은 얼굴과 목에 홍조로 나타납니다. 많은 문학작품에서 사랑에 빠진 연인이 침묵과 그윽한 눈길로 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침묵하는 연인 사이에는 긴장이 있지요. 사랑에 빠진 정신―시도 이와 비슷한 위기와 과정을 거칩니다. 시적 대상에 매혹당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시를 씁니다. 현실가는 욕망의 대상을 싸워서 쟁취합니다. 권력과 돈과 육체적인 힘으로 얻습니다. 시인은 현실의 약자이기에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연애에 비유하면 구혼을 못하는 것이죠. 그러나 욕망은 감출 수 있는 성질이 아니어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표현하는데 저는 문학의 아름다움과 매혹이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줍음은 현실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강력한 기호입니다. 시는 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표현입니다. 시는 은유와 상징이라는 감춤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간절하게 드러냅니다. 인간만이 사랑과 욕망의 미로인 삶에서 먼 길을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동물은 욕망의 순간에 바로 섹스를 합니다(가장 에너지가 적게 들고 현실적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특히 시인은 사랑의 방식에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정하고 환상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열정과 숭고함을 사랑하는 나르시스트입니다.

이 얘기를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 대입해 봅니다. 블레이크는 사물에 깃든 ‘절대정신’에 매혹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정신이라는 ‘대타자’에게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약한 인간이기에 그는 ‘한 알의 모래’ ‘한 송의 들꽃’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문학적인 용어로 ‘주체’와 ‘대타자’와 ‘현상’과 ‘본질’ 사이에 긴장이 발생합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멀수록 시적 긴장이 높아지는 은유법칙이 있지요. 얼굴을 가린 베일이 깊을수록 연인에 대한 환상이 깊어지고 유혹이 발생합니다. 인간이 표현하는 수줍음과 유혹은 한 욕망의 다른 형식입니다. 수줍음은 대상에 대한 욕망을 끝없이 지연시키고 방황하게 만들어 욕망의 샘물이 마르지 않도록 합니다. 예술가는 결코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지요. 문학작품이 끝없이 창작되는 이유입니다.

 

놀이

 

시란 사고와 감정을 재료로 해서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놀이입니다.

사고란 내면화된 행동이며 실제 행동을 위한 시뮬레이션입니다. 감정은 사고의 다른 형식이지요. 외부사물에 대한 희로애락의 판단이 개체가 취하는 행동지침의 원인입니다. 저는 그래서 시란 현실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인간의 앎의 형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놀이이기 때문에 현실의 성패를 따지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상상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꿈과 같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시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뒤집고 기존의 앎을 변형시키고 시형식 같은 게임의 규칙마저 자신이 새로 만들 수 있습니다(능력이 된다면 말이지요).

시를 잘 쓸려고 너무 심각하게 긴장해도 시는 ‘구멍을 판 여우’처럼 숨어버립니다. 어떤 시인은 열심히 지나쳐 여우 구멍을 파는 사람도 있지만 영리한 여우는 이미 세 개의 예비구멍을 파고 있어 달아나고 없습니다. 시는 자신과 놀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에게 고개를 내미는 어린 여우와 같습니다. 자유연상에서의 언어는 여우처럼 상상력의 변화를 보여주고 결국은 다른 세상의 마법을 보여줍니다. 어떤 여우와 노느냐가 시의 내용과 품격을 결정하는데 꼬리가 아홉인 천년 묵은 구미호이면 더 좋겠지요.

 

「순수의 전조」에서 블레이크는 ‘무한’과 ‘영원’이라는 구미호와 놀았고 그의 상상력은 단순하면서도 통찰이 깊은 시를 썼습니다. 사실상 이 시는 다소 긴 장시의 첫 부분입니다. 천변만화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행들이 이어지지만 핵심은 이 4행에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족입니다. 현교(顯敎)인 『반야심경』은 공(空)에 대한 해석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으로 말할 수 없는 경지를 드러내기 위해 밀교(密敎)인 주문으로 끝나고 마지막에는 침묵이지요. 언어분석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를 말했지만 시는 침묵으로부터 수줍게 드러내는 연인의 홍조이자 열망입니다. 시인은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에 대한 그의 사랑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연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