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은 언제나 현재를 쓰는 것
문학작품은 언제나 현재를 쓰는 것
문학작품은 자기가 살아온 과거의 이야기를 쓸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과거의 일 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관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많은 문인들, 특히 수필가들은 유독 이미 자신의 삶 속에 묻혀 오직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많이 쓰는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한 작품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장황하게 써 놓으면 자서전이나 장편소설의 줄거리를 써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줄뿐만 아니라 글이 탄력을 잃고 작품이 산만해지는 것이다.
과거의 이야기를 주제로 쓰려면 작가는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서 그 시대의 현재에 살아야 한다. 즉 모든 문학작품은 현재 진행형이나 현재 완료형으로 구성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과거라는 흘러 가버린 시간을 놓고 한발 뒤로 물러서서 객관적인 서술로 작품을 그려내면 그 작품은 리얼리티가 떨어지게 된다.
참신한 느낌을 주는 글을 쓰려면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의 나의 이야기, 또는 등장인물의 삶과 움직임과 생각을 써야만 된다.
과거의 이야기를 꼭 쓰고 싶으면 아주 간단히 회상의 기법으로 하되 가능하면 현재로 승화시키거나 고도의 기교로 현실과 접목을 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전체 흐름이 과거의 이야기로 일관되면 작가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가능하면 짧은 한편의 작품 속에 평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반영시키려고 하는 것도 무리한 생각이다.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늘어놓으면 글이 산만해지고 주제가 흐려질 수 밖에 없다. 글은 질서 정연하고 논리적이고 조리적으로 짜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테크닉을 습득하지 못하면 글이 잡문이 되어버리고 만다. 문학작품은 아무렇게나 횡설수설 늘어놓는 잡문과는 다르다.
욕심이 많아서 버려야할 것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다 늘어놓으면 군더더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 문학은 자기 인생의 과거 고백이 아니다.
작품 안에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 있고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가상의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이야기를 실감 있게 묘사하여 독자로 하여금 삶을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문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과거의 이야기를 나열하듯이 쓰지 말고, 현실을 토대로 소재를 발굴하고 작품을 쓰는 자세를 가져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유념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꺼번에 다 쓰려하지 말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라는 조언도 하고 싶다.
한가지만을 더 조언한다면 가능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만 하지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 세상의 이야기를 쓰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는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말한다.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3. 진짜 시와 가짜 시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겉꾸밈이 아니라 참된 마음이 깃든 시를 써야한다
4.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시에서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5. 사물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6.사물이 가르쳐 주는 것
사물 위에 마음 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7. 새롭게 바라보기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쓰인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사물들은 마음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시인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시인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8.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하든 자신이 몰두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9. 시는 그 사람과 같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다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난다
마음 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래서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10. 다의적 의미가꾸기
시 속에서 시인이 일부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이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모호성이라 할 수 있으며 다의적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다
11. 울림이 있는 말
직접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좋다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다 말하지 않고 조금만 말한다 그리고 돌려서 말한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 마음이 고이는 법 없이 생각과 동시에 내뱉어지는 말, 이런 말속에는 여운이 없다 들으려 고는 않고 쏟아 내기만 하는 말에는 향기가 없다 .말이 많아질수록 어쩐 일인지 공허감은 커져만 간다 무언가 내면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없다.
12. 한 글자의 스승
시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소중하다 한 글자가 제대로 놓이면 그 시가 살고, 한 글자가 잘못 놓이면 그 시가 죽는다 훌륭한 시인은 작은 표현 하나가 가져오는 미묘한 차이도 놓치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위하여 / 강은교
(1)단어 하나가 떨어져 온다. 가령 한밤중 같은 때라든가 새벽 무렵 같은 때 나는 손을 벌려 그 단어를 받는다. 책상 한 귀퉁이에 늘 놓여져 있는 붉은 색 바구니에 나는 그것을 집어넣는다. 하긴 요즘은 그런 순간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말하자면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그러니까 한때는 상당히 재수가 좋았다. 늘 단어가 공중에서 떨어졌고 나는 그것을 받느라 바빴었다. 내 바구니도 쉴새없이 자기의 등을 열고 그것들을 제 몸속에 집어넣느라고 애를 먹곤 했다.
때로는 단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단어가 줄줄이 이어져 마치 하나의 작은 마당이 내려오는 것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물론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떨어져 내리는 것이 하나의 흐릿한 이미지만일 때도 있다. 어떤 동사라든가, 또는 어떤 명사도 아니며 어귀도 아닌 희미한 어떤 그림 같은 것, 그것은 아주 낯선 어떤 것일 때도 있고, 낮에 보아 두었던 어떤 상황의 변형된 그림이거나 또는 지난 어떤 꿈속의 흐린 그림이거나 또는 오래 전에 읽은 어떤 신문 같은 것의 얘기들 속에서 나의 공중으로 옮겨온 그런 것들이다.
어느 날, 나는 나의 그 붉은 색 바구니의 뚜껑을 연다.
단어 하나가 잡혀 온다.
어귀 하나가, 또는 이미지 하나가 잡혀 온다.
그것은 나의 원고지 위로 올라온다.
이리저리 그것을 끌고 다닌다.
항상 내 오른손의 능력이 보잘것없음에 툴툴대면서 또는 절망하면서,
그것들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할 때까지, 또 몇 개를 더 꺼내 온다. 그것들이 저희끼리 무슨 대화인가를 하도록 지켜본다.
아, 말이 없는 말을 하여라, 너희 스스로 정하여라. 그림을 그려라, 너희 스스로, 너희 스스로.
(2)이런 방법도 있다. 사진 찍기다.
나는 사진사이다. 사진사는 피사체가 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객관적 거리의 감각을 주는 이 방법과 아주 내 마음에 든다. 사진만 잘 찍어 놓으면 사진 속의 인물들 대상들은 스스로 말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또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의 참여의, 어쩌면 가장 비이기적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매일 사진을 찍는다.
학교엘 가면서, 시장에 가면서, 강의하면서, 신문을 보면서, 밥을 먹으면서, 짧은 여행지에서, TV뉴스를 보면서 나는 가능한 한 그날 만난 모든 상황들, 인물들을 선명히 사진찍기를 바란다.
여자들의 사진을 찍고, 대자보들과 흐린 날씨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고, 또는 리어카에 누워 있는 배추들과 상인을 찍고, 덤프트럭을 찍고, 도시의 거리에 엎드려 있는 운동화, 아기고무신,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찍는다.
사소한 모든 것들, 작은 것들을 찍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필름째로 내 단어 바구니의 한 켠에 넣어둔다.
그것들의 원고지 위의 인화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지곤 한다.
제일 먼저 인화하려고 점찍었던 것이 제일 나중에 인화되는 수도 있고, 개중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것 ― 아니 손대지 못한 것도 있다. 인화할 계기가 오지 않은 것이다. 더 좀 묵혀야 한다. 하긴 그러다 그것들의 빛이 아주 바래버릴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내 바구니에 단어와 함께 쌓인 현실의 필름들이 많으면 나는 괜히 희망에 쌓인다. 마약 같은 희망에 말이다.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필름들을 밤새도록 들여다보고만 있을 때도 많다. 그런 날은 단어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밤만 보내 버린다.
버릇이다. 아, 참 쓸데없는 버릇이다.
(3) 그러고 보니 들여다 보기도 많이 했구나.
아파트의 옥상에서 하루 종일 아파트의 뒷켠에 펼쳐져 있는 어느 대학교의 숲을 들여다보던 때가 생각난다. 그후에도 며칠 더 나는 숲을 들여다보러 옥상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때 시를 한편 쓰기는 했다. 동요같은 시를.
그러나 들여다보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눈을 깜빡거린 다든가 하는 식의 우리는 그렇게 사물을 철저히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육안으로는 말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때는 할 수 없다. 의식적으로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나쁜 상태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깊은 강물 같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애쓰면서, 나는 그 강물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내 생각의 가지에 맞는 어귀라든가 단어 하나가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낚싯줄에 무엇인가 걸려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은 개펄의 흙덩이거나 라면 봉지거나 무슨 병조각 같은 것일 때가 많다. 좋은 게 걸려 올라오면 내 바구니에 담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서서, 그 생각을 자꾸 말하고 싶어 안달한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나의 그림을 위하여 ― 그럴 때 나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림을 의식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내가 써보고 싶은 생각을 하나하나 백지 위에 풀어 놓는다. 길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그림을 달아나지 않도록 책상 앞에 붙인다. 온힘을 다하여 그림에 매달린다. 용을 쓰며 턱걸이를 하는 학생처럼.
이런 때 나는 정말 비참하다. 눈물이 흐른다. 그러면서 사전을 찾는다. 별로 성공한 기억은 없지만 비상탈출구 같은 것이 될 때는 있다. 단어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단어와 껴안는다. 그리고 얼른 내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그러다 그것이 내가 그전에 많이 쓴 낯익은 단어임을 알아버리고 다시 슬픔에 빠지긴 하지만, 그래서 기껏 그린 그림이 내가 이미 많이 그렸던, 그래서 익숙해진, 상투화된 그림임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밤은 행복하다.
(4)그것이 어떤 단어들의 집합이거나 구절들의 집합이거나 서툰 필름이거나 그것들이 그래도 괜찮게 이어지도록 나는 끝없이 소리내어 읽는다. 단어들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가도록 나는 끝없이 중얼거린다.
말하지 않으면 말할 때까지, 그것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종이 위에 설 때까지 내 바구니는 그럴 땐 열어 두어야 하리라. 소외감을 느끼는 단어는 스스로 바구니 속으로 다시 들어가리라.
그렇게 나는 오늘도 부질없는 밤을 보내고 있다.
낯설음의 언어 //홍문표
언어의 경제학 : 시나 산문이나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중에서도 시가 시일 수 있는 이유는 언어를 보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사용하거나 상상적인 세계를 추구하거나 사전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2차적인 의미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 시어의 독특한 용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언어와 시를 연구하던 일련의 학자들은 언어의 근본적인 형식인 운율과 구조를 연구하면서 문학의 문학스러움이나 시의 시다운 근본적 특징이 바로 언어의 특이한 용법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들은 문학의 내용, 즉 이념성을 강조하던 시기에 문학성을 언어형식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에 형식주의라고 했는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로 대표적 이론가는 야콥슨, 쉬클로프스키며 프라그 학파의 무카로브스키, 코펜하겐의 엘름슬레브 미국의 웰렉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의 기본 입장은 문학성의 발견에 있었으며 그 해결책은 전통적인 대답이나 임시변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에 대한 해명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심리학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함께 모든 외재적 이론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에서 즐겨 쓰는 영감이나 상상력 또는 전재등에 관한 모든 공론들도 일소에 붙였다 독특한 문학성의 소재지를 작가나 독자의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 작품 그 자채내에서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들은 현대시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시의 경우에 있어 비유, 리듬, 독특한 구문, 어려운 낱말등은 그러한 정신의 절약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의 노력을 더욱 강요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산문과 다른 시의 변별성을 단순한 이미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용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미지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산문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가 전혀 다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시어의 변별성, 즉 시를 시답게 하는 근본적인 어법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들은 낯설게 만들기와 전경화로 설명한다.
낯익음과 낯설음
쉬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비리면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어나 산문적인 언어들은 바로 낯설음의 언어가 아니라 낯익음의 언어이고 낯익음의 이미지였고 낯익음의 형식이었다는 말이된다. 사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에서 시에 대한 인식이나 시어의 기능은 효과적인 전달이나 경제적인 표현이라는 목적에서 설명되었다.
포프는 시의 재치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처럼 잘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어려운 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라 하였고 워즈워드는 낯선 세계를 인간에게 친숙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쉬클로프스키는 언어는 친숙이야말로 가장 비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처음 바다를 경험하는 사람은 파도가 신기하지만 바닷가에사는 사람들은 팓오 소리에 익숙해져서 그들은 그것을 신기하게 듣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도 언어를 친숙한 일상의 것으로 사용할 때는 감동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듣는다. 산문의 언어들이 그렇다. 늘 사용하는 말은 감동이 없다. 처음엔 감동하지만 차츰 만성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낯익은 사람끼리는 서로 바라보지만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주의깊게 쳐다보지는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시들어 버려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한 인정뿐이다 라고 하였다.
친숙화하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반복되어 습관화 되었을 때 조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직각은 자동화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낯익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생략하고 손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탈언어화 상태가 된다. 지각적인 인식의 언어가 생략될 때 남는 것은 기호뿐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호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의 세계가 아니라 수학이고 과학이고 산문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 존재하는 삶이란 이미 창조적 인간이 아니고 기계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비인간화의 무의미한 세계일 뿐이다.
(1)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떳나
남산 위에 떳지
(2) 당신은 짐승, 별, 내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이방(異邦)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갗 및으로 대지(大地)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이성복「당신은 짐승, 별」
인용한 (1)의 동요에서 ‘쟁반같이 둥근 달’이란 말은 수사학적으로 보면 직유법의 구절이라고 하겠지만 쟁반이나 둥근이란 말은 너무나 익숙한 말이며 아예 복합어로 인정될 만큼 굳어버린 일상적인 말이다. 여기서 일상적이니 익숙하니 하는 말은 너무나 평범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나오는 자동화의 언어란 말이다. 남산이란 말도 그렇다. 이 말은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고장이면 어디에나 남산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장은 어린이들에게 교육적 가치는 있겠지만 쟁반이나 남산이란 언어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2)의 당신에 대한 표현이 구절마다 새롭고 낯설다. 당신은 짐승. 별, 손가락 끝, 정적, 꽃씨, 죽음, 머나먼 곳 등으로 전혀 상식적인 상상을 비약하여 충격을 준다.
따라서 예술가가 대항하고 투쟁해야할 것은 바로 이 일상과 습관과 안일과 매너리즘의 권태다. 대상을 습관적인 문맥에서 뜯어내고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과 함께 묶음으로써 시인은 상투적 표현과 거기에 따른 기계적 반응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언어는 바로 일상적인 낯익음의 용법을 배제하고 보다 낯선 용법을 창조하여 지각의 신선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적 자유이고 해방이다.
출처 : 시창작원리 홍문표 창조문학사 (p.308~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