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서.화론

書藝란 어떤 예술인가?

최다원 2019. 10. 18. 09:04

書藝란 어떤 예술인가?

인류 문명의 주춧돌이자 최고의 발명인 文字, 그 문자의 精髓가 바로 서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문자에서 탄생한 예술인 서예, 일찍이 동양의 문화권, 즉 한 중 일

3國은일찍이 이들만의 전통 문화로서 같은 코드를 지닌 서예를 발전시켜 왔다.

같은 문화코드로서 그러나 각각 한자와 한글 가나라는 고유의 문자로

서 나뉘어져 각 민족의 문자를 중심으로 발전 시켜 온 것이 지금의 서예이다.

서예는 문자의 형태와 뜻을 동시에 전달하는 세계 유일의 예술이다.

세계 어느 지역에도 없는 漢子文化圈 특유의 예술, 동양의 문자 뿐 아니라 역사와 사상을 아우르는 키워드가 되어왔다.

서예는 지금도 자라고 꽃 피우기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동방문화의

정수와 문화적 의의를 풀어낼 수 있는 열쇠로서의 시대가 요구하는 美感 느낄수 있다.

우리 민족이 서예로 대변되는 고유 문자의 세계관을 엿 볼 수 있는 오래

된 역사적 실증 자료는 아마도 광개토대왕비석 일 것이다.

당시 고구려 땅에 고구려인 직접 세운 최대의 金石文인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6m39cm 로 그 규모에서도 대륙인의 기질이 드러나는 거대한 역사의 증거이다.

이 비석은 우리민족이 서예를 통해서 구현하고자 했던 民族美感의 始發점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비석의 내용에서 주몽의 정식 호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다. 국강상이라 명명된 언덕에 묻힌 국가의 경계를 넓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만든 왕 중의 왕이란 의미가 될 것이다.

이 비석의 서체는 단순하면서도 강건하다. 정방형이나 장방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침이나 휘어짐이 없이 모든 글자가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있는, 가로 획은 수평, 세로획은 수직으로 질박하면서도 소박하고 힘찬 것이 광개토대왕비의 특징이다.

중국 전체의 어떤 서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민족 고유의 서체라고 할 수 있다.

간체자를 사용한 이 비석은 중국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예서를 찾아 보기 힘들다. 전체적으로는 예서체를 사용하였으나 필요에 따라 전서형태의 필획을 구사하였다.

아직 까지 이 비문은 역사적 사실의 문제, 문학적인 문장의 의미 등을

연구하였는데, 우선 이 비석은 그 당시의 서예작품이므로 서예적인 접근으로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다.

이 비석의 1775자 중 특히 논란이 된 부분이 신묘년 기사인 渡 海 破

의 3글자인데, 이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침략해서 6세기 중엽까지 지배했다는 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자료로 이용되어 왔는데 이 3자를 서예적(書體)으로 살펴보면 광개토대왕비의 모든 글자는 정사각형의 예서체로 모두가 수평 수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도 해 파 의 3글자는 굽은 획도 있고 오른쪽으로 올라간 획도 있으며 좌우 글자의 높낮이도 다르다.

이것은 서체로 판별된 변조의 증거이다. 즉 이 비석의 서체가 민족특유의 서체인 것이다. 즉 살아있는 서체라고 할 수 있는 글자로서 입체감을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서체란 무엇인가?

서예는 획이 만들어내는 조형의 예술이다. 획을 조화롭게 결합해서 한 글자를 만드는 것을 결구(結構)라 하고, 장법(章法)은 한 작품 안에서 글자를 잘 어울리게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획이 지난 곳과 공간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조화로운 조형미가 드러나게 된다.

서예에서 이야기하는 點은 무엇인가? 서양의 점은 정체되어있는 점이다.

먹물이 떨어져 있는 것과 붓으로 찍은 점은 다르다. 떨어져 있는 먹물은 그냥 떨어져 있는 사태이지만 붓끝의 시발과 움직임이 있는 점은 靜속에 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서예에서의 점이다.

서예에서의 획은 스스로 존재하는 요소이며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또한 순간 으로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점의 연속으로서 글자의 살이자 힘줄 뼈대인 것이다. 선을 그었을 때 그 선의 筋,骨,血,肉 이라 해서 근육, 그 근육 안에 뼈가 있고 살이 있고 그 안에 피가 흘러 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서체라고 할 수 있다.

書藝의 書는 손으로 붓을 잡고 말을 적는 행위를 뜻한다. 입에서 나온 말을 잡아 붓으로 기록하니 그 형태가 문자이고 그 문자를 쓰는 행위가 바로 書이다. 서예의 글자체는 기본적으로 五體로 구분하는데 篆書 隸書 楷書 行書 草書 로 이 오체는 시대를 거듭하며 선택된 시대적 美感 이라고 할 수 있다.

서예는 동양 3국의 같은 문화코드이면서 각 나라별로 다르게 발전해 왔다.

중국에서는 書法이라고 부른다. 글씨를 쓰는 기본적인 방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해서 서법이라고 하는데, 유행보다는 오체의 전통을 계승하는데 보다 더 비중을 두고 선인들의 글씨는 법처럼 지키고 이들의 맥을 잇는 것을 중요시 한다.

일본에서는 書道라고 한다. 중국의 한자를 받아들이면서 서도가 탄생하고

발달하게 된다. 이후 가나를 중심으로 가나 서예를 꽃피우게 된다.

한국에서는 書藝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있어서 서예는 문장과 문인화를 아우르는 미적 가치뿐 아니라 사상과 철학적 가치를 드러내는 예술로 이해되고 있다. 한글이 창제 된 후에는 한국적 미감에 맞는 독창적 서예가 발달하게 됐다.

서예란 단어가 문헌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고려사에서이다. 고려시대에 서예라는 관직이 존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서도란 말과 함께 서법이란 말도 혼용되기도 했다.

서예라는 용어를 정식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소전 손재형(1903-1981)에 의해서다. 광복 후 일제시대에 사용되던 서도란 용어를 대신해 서예를 쓸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우리 글씨 쓰기에 대한 독립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書藝란?

필묵을 움직이면서 필묵 속에서 장단이 있고 리듬이 있는 반복이 없는 한번에 표현하는 예술이다.한번 그은 획은 반복해서 그을 수 없다. 백번을 그어도 각각 다른 획이며, 각각의 획은 일회성을 가지며, 획을 긋는 한 순간에 모든 기운을 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서예는 사람의 생명과도 같다. 한번 밖에 없다. 다른 예술처럼 수정하거나 반복해서 할 수 없다. 그래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청나라의 유희재(劉熙載)는 자신의 書槪라는 책에서 서여기인(書如其人)란 말로 요약했다. “글씨란 그 사람과 같다” 라는 뜻이다.

서여기인은 청대의 서예가들이 집대성한 말이다. 서한시대에 양웅이 서심화(書心花)라 해서 글씨는 마음속의 정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당대 이후 明淸시대에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는 관념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그의 저서 완당집에서 이르기를 “文字香書卷氣” 라 하여 읽은 책, 쌓은 학문과 비례해서 그 향이 다르다고 표현 하였다.

인류의 고대 문명의 발생지에서는 기록의 흔적인 문자가 함께 발견 되었는데 중국 문명은 갑골문자에서부터 문자 예술을 발전 시켰다.

BC 1200년 경 중국 尙나라의 수도인 殷墟유적에서 대략 10만여 점의 갑골이 발견되었는데, 거북의 껍질인 갑과 동물의 뼈 조각에 상형문자를 새겼는데 갑의 안쪽에 열을 가하여 그 갈라는 모양을 보고 전쟁의 가부, 의사결정에 대한 예측과 결과 등을 기록하였는데, 이 상형문자로부터 서예의 단초가 시작되었다.

고대문자는 대부분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는데, 중국의 한자 이집트의 상형문자,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고대 문자들 중 한자는 처음의 형상성의 그림문자는 점차 뜻을 나타내는 표의 문자로 발전되어 조형적인 면에서 시각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문자는 종이가 없었을 당시는 제기나 청동으로 만든 솥 등의 금석문으로 존재했다. 이것은 왕의 말들이나 중요한 인사의 기록이었다.

일상적인 기록은 대부분 죽간이나 목간을 이용하였다.

이후 石碑로 존재하는 예술로서의 서예의 극치를 말 할 수 있는 것이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蘭亭序이다. 중국 동진의 서예가로 書聖으로 추앙받 왕희지의 난정서는 그 비석은 존재하지 않고 탁본만이 남아 전해지는데 당 태종은 천하제일의 행서라 극찬한바 있다.

한나라 예서의 대표작인 조전비(BC185)는 후대 서예가들이 많이 임사한 비이다. 비석에 본격적으로 서예가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한나라의 희평석경(동한BC175)에서부터 이다.

후한의 이름난 서예가인 채옹(蔡邕 132-192)이 유교의 경전을 옮겨 적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BC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다호리붓이 발견 된 적이 있는데, 이 붓은 양쪽에 모두 붓털이 존재하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끈 같은 것으로 걸어 매달아 놓을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붓이다.

우리나라 에서도 이미 2천년전 부터 붓을 사용해서 기록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삭도라는 것이 있는데, 다호리에서 붓과 함께 발견된 삭도는 목간을 제작하거나 또는 잘못 썼을 때 지우거나 하는 용도의 칼이다.

이와 같이 서예의 역사적 흔적은 수 천년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붓글씨라 명명되는 붓을 통한 글씨인 서예.추사 김정희가 71살 때 마지막으로 썼다는 봉은사의 편액인 판전(版殿)은 추사의 개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명필로 평가 받고 있다.

얼핏 보면 지팡이 같은 것으로 직직 그어 쓴 듯한 멋이 없는 형태의 이 편액은 그 많은 기교와 기예를 감추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투박하다 못해 졸박성을 띄는 추사만의 개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작품이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는 추사의 글과 함께 유명한 여담이 전해지는데, 제주도 귀향을 가던 추사는 이곳에 들러 대흥사 곳곳에 걸려 있는 원교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편액을 보고 비판 하면서 직접 쓴 편액이 무량수각(無量壽閣) 이었다. 그 후 9년간의 귀향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른 추사는 이광사의 글씨를 다시 걸 것을 청하였다는데 이는 9년간의 귀향살이에서 겪은 혹독한 시련이 또 다른 추사를 만들었던 것이고 그 기간의 그 시련을 통해 완성을 본 것이 추사체였던 것이다.

동양 서예사의 줄기에서 본다면 대표적인 서예의 경지를 이룬 한국적 美感의 표출인 것이다.

이러한 서체 미감의 흐름은 훈민정음으로 까지 이어진다. 먼저 살펴본 광개토대왕비의 글자꼴은 훈민정음의 글꼴은 상당히 비슷하다.

훈민정음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게 되는 대표적인 한글의 서체인 궁체, 이는 선이 맑고 단정하고 아담한 것이 특징이다.

글을 쓰는 서사 상궁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글씨를 탄생시킬 수 있었는데 궁녀들의 이러한 궁체는 수양의 극치에 이르는 글씨를 쓰기 위해 수십년 씩 연습에 몰입했는데, 궁체는 한국적 조형미가 뛰어난 한글 서체이다.

우리말과 글도 빼앗겼던 시기 일제강점기 일중 김충현(金忠顯 1921-2006) 은 우리 서예 지킴의 거목이었다. 1942년 발간한 우리글 쓰는 법 등, 한글 서예와 중국의 예서를 접목한 한글 고체를 탄생시켰다.

또한 민족서예의 대모라 할 수 있는 갈물 이철경(1914-1989) 은 우리 말과 글에 민족의 정신이라 여기고 한글의 전형들을 만들어 내는데 몰두 했던 서예가이다.

인류에게 문자라는 의사소통 방법이 존재하는 한 문자 예술 서예는 끊임없는 발전을 이룰 것이다. 이것은 서예가 정체된 과거의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동행하는 문화 코드이기 때문이다.문자 예술 서예는 이제 시대를 고민 하며 시대의 美感을 창조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곁의 살아 있는 정신적 역사적 생동감을 간직

한 예술로서 존재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