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해석학적 중독
비평과 해석학적 중독
-해석이 상징이라면, 비평은 또 다른 상징의 생성이다// 변의수
비평은 약호의 사전서가 아니다. 하지만, 비평은 종종 사전이 되고자 애를 쓰며 시 텍스트로 하여금 사전적 약호 체계의 산물일 것을 주문하는 것 같다. 시인은 질료적 기호체로서의 텍스트를 만들 뿐이지 의미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
20세기 초엽 카시러는 표현적 또는 재현적 상징 보다 순수 의미작용의 상징을 가장 수월한 단계로 보았다. 카시러의 순수 의미작용이란 소쉬르가 언어 기호학의 제1의 원리로 삼았던 '자의적’(arbitrary) 결합의 방식 그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카시러의 ‘순수의미 작용으로서의 상징’이 뒤샹이 행하였듯 눈 치우는 삽에다「부러진 팔에 앞서서」와 같은 전혀 무관한 자의적 제목을 붙이는 식의, 시적 기호체의 작품 제작방식에까지 사유를 진전시켰던 건 아니다. 하지만 수학이나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시나 예술 역시 자의적 구성의 상징 기법은 보편화 되고 있으며, 시 · 예술에서의 그러한 자의적 상징의 기법은 자의성의 기호에 대한 헤겔의 헌사처럼 ‘낯선 의미를 혼으로서 부여’하는 새로운 문명의 이식과도 같은 충격을 전해 준다.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엄격히 말해 ‘상징 생성’의 매개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텍스트에 대한 비평적 해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텍스트에 대한 기호학적 해석 다시 말해 시작의 양식과 그 문법들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진다.
자의적 상징의 텍스트에 있어서는 더욱이 그러하다. 비평에 있어서 의미의 생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비평가 사적 개인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평의 경우, 재구성 되지 않는 텍스트의 자의성을 질책한다. 그러나, 의미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의미는 지식이나 추론적 이성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상학자는 먹구름의 데이터를 읽고서 비가 올 시기와 그 양을 추정한다. 그러나 어부는 하늘의 먹구름을 읽고서 폭풍우의 시기와 그 강도를 짐작한다. 시를 읽고 접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감각적이고 실존적 차원의 일이다.
의미의 생성에 있어선, 자의적 상징의 텍스트를 접할 경우 비평자 역시 한 사람의 독자에 다름 아니다. 이때 비평가의 주요한 임무는 텍스트(기표적 표상체)에 대한 기호학적 관심 즉, 기표적 표상체에 관한 문제이고, 의미의 생성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져야 한다. 특히, 자의적 상징에 있어서 텍스트를 의미체적 사전이나 하나의 진리와 같은 것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수사적 태도의 해석학적 중독 현상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시 텍스트를 구성하는 시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문제이다. 시인은 ‘의미’마저 형식으로 표상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기 전경화’(텍스트를 객관화시키기보다 작가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현상)에 빠질 수 있다.
해석은 또 다른 창조적 상징 생성의 행위이다.
상징은 동일성(사전적 약호와 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비교에 의한 확인과 그런 유의 믿음 같은 것이 아니다. 상징은 사전 밖의 세계에 대한 직관적 통찰의 획득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추론적 해석의 비평에 대해 그러한 상징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비평적 해석에서도 그와 같은 비약적 직관을 요구하는 까닭에서이다. 적어도 비평가로서의 해석은 단순한 동일성 확인에 관한 비교적 차원의 확인을 넘어서는,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기슭을 향하여 던져지는 다리’와 같은 직관적 상징의 해석을 소망하는 것이다.
추론과 단정 행위는 원관념이 제공되지 않은 미지에의 상징 행위이다. 그 연결물이 해석이라는 비평의 작업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비평은 미지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또 하나의 상징 생성의 행위이다. 자의적 상징의 텍스트는 의미에 대한 지시체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게 한다. 상징은 표상되는 순간에 의미가 생성된다고 한 헤겔이나 에코 등의 언급은, 우리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시의 텍스트가 사전이 아닌 그 이상의 어떤 것임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락은 하나의 개념을 상징한다. 그러나, 진부한 용어들 위에서는 시선이 머물 곳이 없다. 비평이 비평가라는 사전적 주석가의 기술에 그치고 말 수 없듯, 詩文 또한 주석가의 해설을 요구하는 고생대의 화석 같은 죽은 낱말의 나열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비평가에게 있어서 시인은 의미의 생성자가 아닌, 시문 즉, 예술의 문법을 창조하는 자이다.
예술은 비의식의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도 실은 비의식의 결과물일 뿐이지만, 비의식이 얕은 곳에서 의식과 의도적 기호물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고래는 연못의 물고기가 아니다. 새로운 시문법은 깊은 비의식 속에서 끌어올릴 수 있다. 시 · 예술을 밝은 의식계로 인도해내어야 하는 책무가 비평가에게는 있다. 사후추론적 논의들인 수사학과 논리학이 시 · 예술을 창작케 하고 훌륭한 논리를 구사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류와 미망 속에서의 착오의 과정은 줄이게 한다. 사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음 세대들을 위하여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사후추론적 해석의 작업으로서의 비평이 한갓 사전적 정의의 기록과 재단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은유와 시는 촛점적 과학이 제시하지 못 하는 존재론적 인식과 성찰을 유도한다. 과학이 초점적 추상화의 철학을 추구한다면, 시 · 예술로서의 은유와 상징은 실체적 존재론의 인식을 추구한다. 은유는 형식논리의 입장에서는 기만이나 거짓이다. 그러나 모순적 현상의 내부에 은유는 통일적 참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시적 은유의 힘과 본질은 거기에 있다.
자연의 세계로 나침반을 돌려놓을 수 없는 현금에서 은유는 신화의 훌륭한 대유물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사보다도 찰나적 통찰이 더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좌뇌적 사유에 의존하는 과학 못지않게 은유는 더 깊은 비의식의 자연에 닿아 있는 때문이다. 비평이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다면 비평이야 말로 한낱 공소한 수사적 유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시가 하나의 감추어진 사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평 역시 약호들의 체계물로서의 사전 그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때 과연 사전의 겉표지와 시 텍스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비평은 참고서가 아닌, 원전으로서의 법문(法文)으로 또 하나의 상징 행위를 요구하는 상징 작용이어야 한다. 상징은 사전적 조회(照會)나 그 어떤 수사학적 또는 알고리듬적 전개의 산물이지 않다. 상징은 비의식의 직관과 통찰의 산물이다. 비의식의 시 · 예술의 도식을 의식의 빛으로 투사해내어야 하는 이유를 오늘의 비평계는 인식해야 한다.
시의 토대 - 이수명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들과의 밀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들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공황 상태다. 의식은 마비 상태에 가까운 무력증을 드러내고, 두뇌는 기능을 잃는 듯이 여겨진다.가진 것을 잃은 것이다. 이는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을 잃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다. 정신이 무장 해제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무장 해제된 정신이란 정신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시는 정신이 거느렸던 기존의 무기를 버리고 무기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새로운 무기이다. 더 날카롭고 강력한 무기이다. 감각은 새로운 차원의 감각이어서 시각과 청각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감지할 수 없었던 것들을 포착하며, 인식은 사물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로 나아간다. 투시하고, 침투하며, 스며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교란을 가져온다. 앞에 서서 흔들어 버리는 것, 정신의 전위,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유로움을 위해서는 내면에 무엇보다도 황무지를, 개간되지 않은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거칠고, 황량하며, 무의미한 황무지가 펼쳐져야 한다. 주어진 모습을 찬양할 뿐,바늘 하나 꽂을 수 없게 가꾸어진 정원의 창백한 충만은 시가 들어서기엔 운위의 폭이 너무 좁다. 무의미한 황무지에서 보내야 하는 맹목적인, 무차별적인 시간은 정신을 소모시키며, 그러므로 들끓는 정신을 소비하는 데 황무지는 필수적이다. 황무지가 넓고 광활할수록, 필요 없는 삽질을 깊이 할 수 있으며, 깊이 들어갈수록 수맥을 만날 가능성은 넓어진다.
이미지 혹은 말
이미지와 씨름하는 시인이 있고 말과 씨름하는 시인이 있다. 이미지는 묶여 있고, 말은 풀려 있다. 이미지는 사로잡으려 하고, 말은 해방되려 한다. 이미지에 의한 이미지 비판이 더 강력한 이미지로의 전환이라면, 말에 의한 말의 비판은 막을 수 없는, 커 가는 심연에 대한 말들의 동원이다. 이미지를 지향하는 시는 구상에 가까워지고, 말들을 운용하려는 시는 추상에 기울어진다.
언제나 이미지나 말을 찾아 헤매는 시인들은, 이미지나 말들이 침입하는 순간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는다. 이렇게 가까이서 오는 시가 있는가 하면, 아주 멀리서, 뜸을 들여, 힘겹게 오는 시도 있다. 그때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손을 내밀어 끌어야 하며, 그 거리를 단축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예컨대 어떠한 한 순간 혹은 하나의 말을 폭력적으로 가로막거나 잡아채기도 하고, 이미지들과 말들을 새로운 공간에서 혼합, 배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시의 밖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 정체를 깨닫지 못한다. 지루한 수작업이 계속 될 뿐이다. 멀리서 오는 시는 이러한 미궁 속에서 대체로 완성된다.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시 속에 녹아 들어 있다.
이미지나 말과 씨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험난한 과정임을 암시한다. 이미지나 말은 대개 문을 닫아 걸고 있다. 문을 열고 눈앞에 있어도 어딘가 다른 곳에 그들이 존재하는 듯이 여겨진다. 그 다른 곳을 찾아 다가가지만, 그 다른 곳은 또 다른 곳에 있다. 시를 쓰는 일은 패배의 연속이다. 문 앞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서기 마련인 것이다. 시인에게는 뇌 속으로 땀이 흐르는 일이다. 하지만 저항이 강력할수록, 강한 폭포수일수록 그것을 역류한 물고기는 생명력이 넘친다.
사물들
사물들은 상상 속에 존재한다. 상상 되었을 때 사물들은 시로 들어온다. 이것은 사물이 상상 속에서 구성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다. 빛, 색채, 음향, 질감, 냄새, 속도, 움직임 등등.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물의 이미지는 가장 중요하다. 이미지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고, 있다 해도 알 수 없다.
사물들은 눈앞에 현존하고 있지만 현존 속의 부재, 즉 제 육체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불러내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물들이 물질 단위가 되어 물질의 감수성으로 운동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여러 방향의 상상이 촘촘히 얽혀야 한다. 상상이 명료할수록 사물의 움직임도 선명하다. 상상은 사물의 집, 존재의 집이다. 집 속에서는 사물들은 침묵이라는 죽음의 외투를 벗는다. 그들은 분주히 이동하고, 넘나들고, 흩어지고, 모여든다. 불투명한 것은 투명해지고, 투명한 것은 불투명해진다.
시 속으로, 상상 속으로 들어온 사물들은 매혹하는 사물들이다. 매혹적인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그 사물들은 선명하면서도 붙잡을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다. 시인이 사물들에 충분히 매혹되어 있을수록 사물들은 압도적이면서도 모호하고, 순간적이면서도 다면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다.
시인은 사물의 이러한 우월성에 순종해야 한다. 사물이 키가 커지고, 그림자가 길어지고, 색채가 다양해지고, 움직임이 풍부해질 때, 그리하여 시인이 아주 작아지거나 사물 속에서 사라져 버릴 때, 사물들은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확장한다. 세계는 더 많은 미지와 가능성을 얻게된 것이다.
운율
운율은 동의와 다툼의 화음이다. 동의하지만 다투고, 다투지만 동의한다. 시가 음향에 이끌리는 것은 시에게는 언제나 좋은 일이다.운율을 벗어났을 때 시는 행복하고, 벗어나 더 포괄적인 운율 체계를 직감했을 때 시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또는 운율에 굴복했을 때 시는 행복하고, 굴복 하여 날개를 얻었을 때 시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말과 침묵
한 편의 시에서 말과 침묵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환유의 화려한 발달이 말의 아름다운 결합을 돋보이게 하는 시가 있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침묵이 그 우위에 서 있는 시가 있다. 전자는 브르통의 「자유로운 결합」 같은 시를 들 수 있고, 후자는 본느푸아의 「소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도 있다. 말의 반대편에서 침묵이, 침묵의 반대편에서 말이 오고, 말과 침묵이 서로를 읽는 듯, 읽지 못한 듯, 무심하게 지나치는 경우이다. 이는 시를 읽을 때 말들의 소용돌이와 무관하게, 읽혀지지 않고 끝내 말해지지 않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또하나의 소용돌이가 저변을 관류할 때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미쇼의 「태평한 사람」같은 시가 있다.
모든 시는 말과 침묵이 씨실과 날실로 엮여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말은 침묵을, 침묵은 말을 잉태한다. 말 속에는 말보다 더 많은 침묵이, 침묵 속에는 침묵보다 더 많은 말이 도사리고 있다. 말은 침묵을 폭파시키려 하고, 침묵은 말을 폭파시키려 한다. 말과 침묵은 언제나 대칭을 벗어나 비대칭을 지향하지만, 다시 말해서 말과 침묵이 하나가 되기를, 침묵으로 말하고, 말로 침묵하기를 원하지만, 이는 관념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시에서 말이 침묵이 되고 침묵이 말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말은 계속되는 말을 통해서만 침묵을, 침묵은 계속되는 침묵을 통해서만 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시인은 자신이 쳐 놓은 덫에 걸린 사람이다. 시를 썼을 때에만 그는 그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펜을 잡고 언어와 씨름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시가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시에 근접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접근이 용이치 않아 불만족스러울 때는 덫이 더 옥죄어 들고,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듯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 그는 그 덫에서 해방됨을 느낀다. 한 편의 완성된 시 앞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정은 사실 이 해방감 외에는 없다. 그는 해방되기 위해 쓰고 또 쓰는 것이다.
시적 인식
인식이라는 것은 자립적으로,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인식 대상에 대한 형상화의 옷을 필요로 한다. 형상화는 인식에 이르는 길 같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말이라는 것도 이미 그 자체가 기초적인 단계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추상적인 본질도 말이라는 매개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말에 의하지 않고는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므로 인식이란 말에 의해 그려지는 구상화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말이라는 것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일지라도 그 말과 관련된 어떤 관념과의 관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과 함께 떠오르는 이 관념,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이 지니고 있는 인식의 측면을 시는 문체, 운율, 형식을 통해 최대한 이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인식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시적 인식이란 통상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이라는 것이 본래 인위적인 관계의 설정, 배치, 반복, 교환, 전환 등의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적 인식에 와서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와 규칙이 자유로워진다. 시에서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이상을 향한 인간 본연의 욕망이, 세계와 사물에 대한 탐구라는 인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원칙 안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
현대시라는 말은 현대에 쓰여진 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쓰여졌어도 결코 나이를 먹지 않으면 현대시이다. 어떤 시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기법이나 형식에 있어서,시적 인식의 방향에 있어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경우가 그렇다. 때로 당대에는 너무나 멀리 나아간 것처럼 보이는 시들, 그래서 불길하고, 당대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시들, 하지만 그들로 인해 극지가 있음을 알게 해 준, 스스로 극지가 되어 버린 시들이 현대시이다. 이후 그를 따르는 후대의 시들이 그를 발판 삼아 나아가려 해도 더 이상 거기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세계를 개화시킨 시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시라 할 수 있다. 현대시는 발전이 아니라 모방을 낳는 시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그 어떤 조류에도 현대시는 존재한다. 어느 조류에서든 고독하게 자신의 형식을 실험하고, 정교한 패턴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스러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현대시는 자신의 존재 양식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라는,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당대의 상황에서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떨어짐이 앞선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 동떨어진 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시 문학사의 줄기가 새로 형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