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모퉁이에서 피다, 지다 - 박일만

최다원 2023. 1. 25. 19:33
모퉁이에서 피다, 지다 - 박일만



검정 칠을 하고도 희게 웃는 사내,
목발 세워 둔 한 쪽 발을 길게 밖으로 걸렸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공간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바닥까지 검정물든 손을 탁, 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 수 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이웃듯 손 빠른 사내
헤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속내를 보이진 않지만 손에 친친 광목을 감으며 말하겠지
자,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적당히 가리면 살만 하잖아요
구석에 앉아 왁스에 취해 밖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오래오래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과 나
그만 둬야지, 이제 정말 쉬어야지 하면서도
끝끝내 꽃피고 싶은 무화과나무 척박하게 웃는 거리 모퉁이
천천히 천천히 아주 객관적으로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