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그리운 통증 - 양현근

최다원 2024. 2. 21. 19:11

그리운 통증 - 양현근

 

 

 

1

길 건너편 똥개가 컹, 어둠을 한입 물면

온 마을의 개들이 일시에 일어나

컹컹, 적막강산 긴긴 밤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아랫마을 불빛이

숲을 질러 처마 밑까지 왔다

장독대, 폭설, 고요

등허리가 시린 문풍지는

도란도란 솔바람소리를 베고 잠이 들고

길 잃은 눈발이 개집까지 마구 들이치는 밤

마루 밑 댓돌에는 밭은기침소리 고이고

눈이 침침한 금성라디오가 혼자 칭얼거렸다

 

2

소년은 꽁꽁 언 잠지를 딸랑거리며

얼어붙은 논두렁 사이를 펄럭거렸다

먼 저녁이 매달리던 참나무에게 돌팔매질을 날려대면

폭설은 마을의 길이란 길 다 지우고

아랫녘으로 가는 도랑의 물소리만 풀어놓았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면

오늘의 날씨 큰 눈 왔음, 길이 지워졌음

그렇게 일기장에 적었다

소여물이 끓던 사랑방 아랫목

할아버지의 걸걸한 기침도 화덕처럼 끓고

외롭고 심심한 손가락이

장지문 여기저기 숨구멍 뚫어가며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3

낡은 기와지붕이 고드름을 하나, 둘 매다는 동안

소년도 대나무처럼 몸의 마디를 키웠다

겨우내 눈발을 뒤집어쓴 대숲은

어디론가 보내는 울음 소인을 쿵쿵 눌러대곤 했다

아직 산골의 춘삼월은 멀고

산 그림자는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밤새 호롱불 깜박거렸다

돌팔매질로 멍든 참나무 껍질이 아무는 동안

눈은 몇 번이고 쌓였다가 녹고

그렇게 겨울이 말없이 오가고

기침소리도 녹았다 풀렸다

 

4

궁금한 강바람이

구멍 숭숭한 돌담에 휘파람소리를 내려놓고

봄기운이 얼음 계곡에 숨구멍을 냈지만

어느 해부터 할아버지 밤 기침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통증은 소년의 옆구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꿈을 꾸면 왼쪽 갈비뼈가 따라 올라오고

오래 숨겨둔 기침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울음의 마디를 쏟아내곤 했다

아프고 시린 말들이 번식하는 계절이었다

 

5

며칠 전부터 왼쪽 허리가 시큰거리더니

왼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푸른 말발굽으로 내달리던 시절

드넓은 풀밭을 겁 없이 질주하다 자주 넘어진 탓일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엎지른 탓일까

등베개를 집어넣으니 비로소 균형이 잡힌다

세상과의 간격에는 적어도

등베개 하나 이상의 거리가 있다는 걸 안다

밤이 되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마른기침, 눌러 참을 수 없는

왼쪽 허리쯤에 도착한 그 저녁의 폭설이여

차마 그리운 통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