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썩는다는 건 - 김금용

최다원 2024. 2. 23. 19:24

썩는다는 건 - 김금용



애호박이 마술을 부리나
냉장고를 열으니
상표 선명한 비닐봉지 채
고스란히 물이 되어 누워있다
같은 날 산 양파와 고추는
독하고 매운 성질 탓일까
색도 빛도 잃지 않고 겉으론 멀쩡하다
날파리가 몰려들어도 시침을 뗀다
껍질을 벗겨보면 속으론 피멍 들고 내장이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나를 버리지 못한다

썩는다는 건 기쁜 일이다
물로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모든 사물은 물이 되어 흐른다는 걸
싯다르타는 진작 깨닫고 부처가 되었다지만
책에서 배우고 맘으론 다잡으면서도
안으로 썩어가는 냄새를 감추지 못하는 난
오늘도 집을 나서며 껌과 향수를 찾는다
척추 뼈를 세우려 한다
온전히 버릴 줄 아는 호박은
아무래도 전생의 부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