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서.화론

[스크랩] 완당 바람

최다원 2015. 3. 18. 21:59

완당 바람

(추사가 후대의 조선 예술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미술사학자(이동주, 안휘준, 윻홍준 등)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추사는 본인이 의도하였든, 아니 하였든 간에 청국의 문인화풍을 가져옴으로 조선 후기의 예술사 흐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과정을 대략이나마 살펴보고, 오늘의 시각에서 평가하였다.

 

  영, 정조 시대는 새로운 청국 문화가 빠른 속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실용주의 사상, 신과학, 새로운 학문과 예술 경향, 천주교 사상까지 흘러들어 왔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근대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근대화 운동은 조정이 중심이었다.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 세력이 중심이 되어서 근대화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정치의 중심 세력도 근대화의 방향 설정에 한몫을 한다. 이때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층은 보수적인 사대부였다.

 

  보수적인 사대부의 취향은 서민 계층과는 다르다. 조선 후기의 사회는 양반 전체를 대변하는 사대부와 세도가문이 핵심이 되어서 착취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권력 핵심에서 소외된 세력들이 실용성을 부르짖어도 권력 핵심부는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들은 소학(小學), 서예, 금석비첩학, 경학(經學)에는 귀를 기울이고 받아 들였다. 이러한 지배층 문화를 대변한 사람이 추사이다. 중국의 문인화를 조선에 갖고 온 신위만 해도 추사와는 달랐다. 자하(신위)가 수집한 화첩에는 이인문의 산수화와 신윤복의 춘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추사에게는 점잖은 문인화풍의 그림만을 수장하였다.

 

  완당은 그림과 글씨를 구별하지 않았다. 송의 소동파 전통을 따라 난초 그림에서 그는 화론을 전개하였다. “난초 그리는 법은 또한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기미가 있은 연후에 얻게 된다. 이 화론은 심의(心意)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여 보는 문인화의 묘미를 설파하고 있다.”

 

  완당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추종한 사람들은 권문세가. 관료 계급, 중인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다. 시, 서, 화 삼절이라는 신위는 말할 것도 없고,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 세도가인 안동 김씨 가문, 풍산 조씨의 조인영, 유명한 서예가인 조광진 등등이다. 후대에는 당시의 임금이었던 헌종, 대원군, 박규수, 신헌, 이유원, 신관호, 안재부 형재, 역관인 이상적, 오경석이 추사를 따랐다. 화가로서는 조희룡, 전기, 허련, 이재관, 김석준이 있다. 민씨 세도가의 중심 인물이었던 민영익도 추사의 난법을 따랐다.

 

  완당이 죽은 뒤에는 대원군과 민영익이 자신들의 시대를 열면서 완당 바람을 일으켰다. 이 바람을 계기로 한국의 예술계는 문인화 바람으로 뒤덮였다. 완당 바람은 영, 정조기에 일어났던 사경산수와 속화를 하루아침에 날려 버렸다.

 

  완당이 적극 추진하였던 문인취미는 단순히 문인화라든지, 남종적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고도의 교양과 날카로운 심미안을 가진 사람만이 감상할 수 있다. 지식으로 무장한 이념미를 필선과 먹의 색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철저한 귀족 취미이다. 이러한 미술은 한 사람의 천재(김정희)가 탄생할 수는 있었지만 대중들이 따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완당의 서예를 이야기 할 때는 예서를 중심으로 말한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청나라에서 금석 비첩학을 공부하면서 예서를 필법의 기본으로 생각하였다. 추사가 청에 가서 교유를 나눈 사람이 비학의 이론적 선구자인 완원이다. 추사의 예서풍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는 대원군 이하응과 조광진이 있다. 조광진의 예서는 추사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원군 이하응은 서예 뿐 아니라 난초를 그리는 법을 배워서 따랐다. 대원군이 추사를 추종하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보수 정치권력의 핵심 인물로서 그가 추사를 따른다는 것만으로 서단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예서의 자료가 풍부해진다. 한비의 탁본이 많이 유행함으로 다양한 서체의 예서가 유행하였다.

 

  원교 이광사와 관계를 잠시 살펴보자. 이광사는 남인 계열의 학자로서 집안 대대로 명필가로 이름이 났다. 더욱이 인품이 고고하여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원교는 왕희지 법첩을 바탕으로 조선의 풍격으로 서체를 개발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더욱이 서예의 역사와 이론을 ‘필결’을 저술하였다. 그의 글씨는 화동서법(華東書法)이라는 목판본 책으로 만들어서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추사는 원교의 ‘필결’에 후기를 쓰면서 혹독한 비판을 하였다. 비판의 요지는 원교가 왕희지의 서체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추사의 서체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북비에 뿌리를 두었다. 비판의 요지는 북비는 당대의 글씨이지만 왕희지의 글씨라는 악의론(樂毅論)과 황정경(黃庭經)은 왕희지 글씨의 원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판각에 판각을 거듭하면서 변질이 되어서 가짜라는 것이다. 가짜인 줄도 모르고 법첩으로 여겨서 공부하는 짓은 한심한 일이라고 하였다. 고비(古碑)를 볼 수 없을 때는 구양순이나 자수량을 통해서 진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추사 자신이 구양순체를 규범으로 삼았고, 또 그를 통하여 추사체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미술이나, 문학을 이야기 할 때 서로 반대를 이루는 이론이 있다. 미술이나 문학사를 보면 절대로 한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이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흐르기를 반복하는 것이 예술사라고 말한다. 미술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읠 꼽는다. 또 추상과 구상을 꼽는다. 문학에서는 정신을 우선시하는 칸트와 현실을 중시하는 헤겔을 양단에 두고 순수 문학이니 참여 문학이니 한다. 그리고 이쪽으로, 또 반대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 그렇다면 서예도 법첩과 비학을 양 단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학에 뿌리를 둔 추사가 법첩을 주장하는 이광사를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원교의 필결이 조선에서는 거의 서예의 교본이 되어서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자신의 서법을 퍼트리기 위해서는 원교를 폄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원교는 추사의 원교 필결후기 이후로 치명상을 입었다고 하였다.(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우리는 원교와 추사의 관계를 누가 옳다. 아니다,로 보지 말고 서예사의 흐름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완당 바람이 너무 거세서 오히려 서예의 발전에 역효과를 내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소호 김응원이 추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호 석제를 대원군에게 받은 서병오(1862-1935)도 예서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성황 김돈희(1879-1937)도 추사의 영향으로 예서를 썼다. 김돈희와 서병오는 조선미전의 서예부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함으로 후대의 서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더욱이 김돈희는 조선 미전 10회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심사위원이었다. 김돈희는 소형 손재형과 월전 장우성을 제자로 두었다.

조선 후기에 서화계에 미친 추사의 영향을 이동주는 ‘완당 바람’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동주는 완당 바람을 약간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평가하였다. 그의 글을 소개하겠다.

 

“완당 바람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 보면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 뻗고 자라날 그림의 꽃나무룰 모진 바람으로 꺾어버린 것 같아서 기분이 야릇해진다. 왜냐하면 완당이 태어난 정조 때는 마침 위리나라에서 진경산수와 속화라는 일종의 세 화풍이 꽃봉오리같이 피어오르던 때이다. 옛 그림이 만일 그대로 그러한 풍조를 탔다면 혹은 새로운 기법, 새로운 화법 위에 선 새로운 근대미를 그림 속에 찾았을지도 모른다.”

 

“완당 바람이 불던 구한 말에 (추사의 영향을 받은) 석파(이하응), 운미(민영익)가 난초를 그리고 정학교가 괴석을 그리고 화공은 여전히 정식 산수를 그리는 동안에 그만 세상은 바뀌었다. 옛 그림은 그것이 요구하여야 하는 현실적인 미감과 유리되었다.”

 

안휘준은 이렇게 적었다.(한구회화사 연구)

“조선 말기의 화풍은 남종화이다. 조선 후기의 남종화 전통을 계승 발전하였다기 보다는 청대의 남종화를 위주로 하고 원대와 명대의 남종화를 섭렵하는 경향을 보편적으로 따랐다. 아마도 청대의 화단과 긴밀한 교섭을 가졌던 김정희의 영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믿어진다.”

  광복 이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창설하면서 서예부도 부활하였다. 서예부는 손재형이 좌지우지 하였다. 한문 서예에서는 오체(五體) 중에 예서를 쓴 입상자가 반이 넘었다.

 

  이후에 국전은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 형제가 주도 하였다. 이들은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가학으로 예서를 익힌 서예가들이다.  추사가 주창한 예서는 오늘까지도 서예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희순, 조선시대 예서풍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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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촌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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