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서.화론

김홍도/신윤복

최다원 2015. 9. 4. 22:25

김홍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畫士)·첩취옹(輒醉翁).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홍도는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이 되었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畫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畫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 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 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작품세계]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그리고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 작인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 주듯이, 주로 화보(畫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 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北宗院體畫的) 경향을 나타내었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된다. 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皴: 산봉우리나 바위 주름의 형태를 연꽃 잎새의 줄기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 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 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文: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 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群仙圖屛)」(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신윤복

출생 1758년

거주지 조선 한성부에 거주하였음

국적 조선

별칭 자는 입부, 덕여, 아호는 혜원

학력 첨절제사

직업 무관, 화가

종교 -

배우자 미상

부모 아버지 신한평, 어머니 홍천피씨

친척 동생 신윤도, 여동생 신씨, 종조부 신일흥, 종증조부 신세담

신윤복(申潤福, 1758년 ~ ?)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또한 양반 관료들과 여성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본명은 가권(可權), 호는 혜원(蕙園)이다. 대표작은 미인도(美人圖)·단오도(端午圖) 등이 있다.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신숙주의 후손이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생애[편집]신윤복은 영조34년(1758년)에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가권(可權)으로 뒤에 윤복으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가권(可權)으로 밝혀진 것은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서 신가권이라는 도서가 찍힌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신윤도(윤수)와 여동생이 1명 더 태어났다.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1] 으로, 암헌공 신장(申檣)의  다섯째 아들인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의 7세손이었다. 그러나 신공섭이 서자였기에 그의 후손들은 중인(中人)의 신분으로 낮아져 수십명의 역관과 율관, 운관으로 활동했고 신세담ㆍ신일흥ㆍ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왔다. 그의 가계도 20세기 이후에야 몇몇 문헌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서자의 후손이라서 족보에서 생략되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종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아버지 신한평도 도화서의 화원으로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조 초기에 와서 그가 그린 그림 중 한 그림이 알아 볼 수 없다 하여 관료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당하기도 했으며, 관직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고 산수·인물·초상·화훼를 잘 그렸다.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관원이 되는데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양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양반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연애와 애환을 묘사했으며 해학이 담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 사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 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든다. 그가 남긴 작품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데, 대략 1813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사망일과 사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작품[편집]주요 작품으로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미인도(美人圖)》 등이 있다.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은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로 여겨지기도 한다.[2]

《풍속화첩》에는 〈단오도(端午圖)〉, 〈연당(蓮塘)의 여인(女人)〉,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이 있고, 《미인도》와 《풍속화첩》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세계[편집]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정(僉正)에 올랐다.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오원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4대 풍속화가로 손꼽힌다. 주로 풍속화를 그렸으며, 산수화와 영모화(翎毛畵,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춘화 작품도 남아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 등은 소재 선정부터, 구성, 인물들의 표현 방법과 설채법 등에서 김홍도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신윤복은 남녀 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인물화에 있어서는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중국과 서양 상인을 통해 들어온 안료들을 이용하여 붉은 색, 파란 색, 노란 색 등 그림에 다양한 색채를 입히기도 했다. 다양한 색체의 컬러를 사용하던 첫 화가들 중의 한사람으로 기억된다.

시정 촌락의 풍속도 중에서도 기녀(妓女)·무속(巫俗)·주점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화가로서 현실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이는 유교주의 사회에 대한 예술 면에서의 항의였고, 인간주의의 표방이라는 평가도 있다.

신윤복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신윤복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짧은 찬문과 함께 관지와 도인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대와 시기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의 작품 중 최후의 작품이 전하는 연대는 1813년으로, 다만 그가 이 시기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가족[편집]아버지 : 신한평(申漢枰, 1726년(영조 2)[3]∼1809년?, 호는 일재(逸齋)

 

어머니 : 홍천 피씨

동생 : 신윤도

여동생 : 고령신씨

부인 : 홍성 박촌

종조부 : 신일흥(申日興, 역시 화원이었다.)

종증조부 : 신세경

대중 문화[편집]이정명의 바람의 화원을 원작으로 한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영화 《미인도》에서는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하기도 했다.[4] 이 설정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사학계의 비판을 받았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경우, 그림을 그린 나이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되었다.[5]

기타[편집]유교적 도덕관념이 강했던 시기에 양반들을 풍자하였으면서도 자신의 실명과 낙관을 밝히는 파격적이고 대담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처벌받지 않았고, 그는 자유분방한 예술세계를 구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