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25.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시론>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중국의 문학이론>)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청장관전서>)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 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
(시인이 <사랑법>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밤에>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장옥관, <걷는다는 것> 전문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26. 시를 완성했거든 시로부터 떠나라
고등학교 시절, 여학교 시화전에 가기 전에 문예반 선배들은 우리를 세워놓고 이렇게 명령했다.
“반드시 여학생 하나를 울리고 와야 한다.”
선배들의 사주를 받은 우리는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럴싸하게 악동의 표정을 연기했다. 시에 대해 질문이 있다는 핑계로 한 여학생을 불러놓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그 여학생의 시를 집요하게 칼질했다. 여학생은 도마 위에 올려진 한 마리 가여운 생선이었다. 악동들의 파상적인 질문 공세에 파들파들 떨다가, 주춤거리며 대답하다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학생이 운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울음을 끄집어냈던 것이다. 시화전시장을 상갓집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 우리는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그때 우리들이 파놓은 질문의 수렁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교복들이여, 부디 용서하시라.).
<시인은 언어의 대변자일 뿐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
차라리 그 여학생,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더라면 악동들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친절한 여학생은 자신의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설을 하면서 우리들의 마수에 걸려들었던 것. 이 시를 쓴 계기가 무엇이라거나, 무엇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거나, 시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그 여학생은 순진하게 진술했을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시에 대한 겸손하고 친절한 답변을 통해 그 시의 감동을 높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시의 감동이 아니라 시의 몰락을 불러오는 변명이고 화근임을 여학생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 속에 다 있어요.”
그냥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쌀쌀하게 돌아섰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뻘쭘해진 우리 악동들이 오히려 두손들고 줄행랑쳤을 것을!
일찍이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시인 자체를 언어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언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자일 뿐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시를 창작하는 사람은 시인의 개인적인 삶과 시를 별개로 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삶은 엉망진창으로 살되 건강한 시를 쓰라는 말이 아니다. 시라는 텍스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지 창작자의 사사로운 체험이나 느낌을 가지고 시를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사람의 시인이 쓴 것이지만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우주가 불러주는 감정을 대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시에다 쓴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것이며 독자의 것이지 시인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완성했거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 시를 잊어버려라. 당신은 그 시로부터 미련 없이 떠나라.
바닥난 통파
움속의 降雪(강설)
꼭두새벽부터
降雪을 쓸고
동짓날
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木手巾(목수건)
박용래(1925∼1980)의 <시락죽>이다. 시인은 갔어도 우리는 오늘도 이 시의 언어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본다. 시를 읽을 때마다 행과 행 사이의 건너뜀이 왜 이런 보폭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降雪’은 왜 ‘강설’로 바꿔 쓰면 안 되는지, ‘후살이’는 왜 세간의 ‘세컨드’와 다른 의미인지 생각하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빗자루로 간밤에 내린 눈을 쓰는 마음을 생각하고, 목수건에 오른 때를 생각하고, 지금은 옆에 없는 이 여인의 남자를 생각한다.
시가 다다라야 할 언어의 절제력과 고밀도의 기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우리는 박용래 시인에게 물어볼 수 없다. 아니, 설령 시인이 살아 있다 해도 물어보는 우를 범해선 안 되리라.(만약에 어떠한 연유로 쓴 시인지를 우리가 묻는다면 시인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아이처럼 칭얼대시겠지.)
<시의 결점 지적하면 달게 듣고
오독해도 가르치려 들지 말라>
어리벙벙한 시인은 대체로 자신의 언어가 투명하다고 착각한다. 시인이 명징하게 말을 한다고 해서 독자에게 언어가 다 명징하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 침묵, 혹은 말과 말 사이의 침묵도 모두 결국은 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형상은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침묵의 세계>에서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형상, 즉 이미지는 “말하는 침묵”이다. 시가 언어를 통한 표현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는 매우 도발적인 지적이다.
“시인의 말은 그것이 태어났던 침묵과 자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 안에 깃든 정신을 통해서 스스로 침묵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여, 누군가 당신 시의 결점을 지적하면 겸손하게 귀를 열고 가만히 들을 일이다. 얼토당토 않은 비판이라도, 돼먹지 못한 소리라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 해도 달게 들어야 한다. 독자가 당신의 시를 오독한다고 독자를 가르치려고 대들지 말 것이며, 제발 어느 날짜에 쓴 시라고 시의 끝에다 적어두지 마라. 당신에게는 그 시를 완성한 날이 대단한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독자는 그 따위를 알려고 당신의 시를 읽지 않는다. 당신이 완성했다는 그 시는 당신의 마음 속에서 완성된 것일 뿐, 독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언제든지 변화하고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보더라도 분명히 당신의 시임을 알게 하는 게 최선임을 잊지 말라.
<끝>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