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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시론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by 최다원 2021. 9. 27.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 현 (1942~1990)

●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며 부를 축적하게 하는 수단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고 있다.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이 우리는 문학을 함으로써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한 힘을 알게 된다. 문학은 그 부정적 힘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 문학을 통해 얻은 감동은 대상을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감동이나 혼의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문학으로부터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고 느끼게 된다.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이 대목을 쓰려니까 갑자기 내 의식은 어렸을 때의 어머니의 음성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고구마나 감, 하다못해 동치미라도 먹을거리로 내놓으시고, 나직한 목소리로 당신이 경험한 흥미로운 이야기, 주변 사람들이 겪은 슬픈 이야기, 무서운 동물이나 귀신이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를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하셨다. 그때에 느낀 즐거움, 슬픔, 무서움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감정 밑에 있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주는 쾌감을 내가 얼마나 즐겼던가!

무서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즐기기 위해서 이야기를 듣는다. 이처럼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서 문학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것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을 안 당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한다. ‘인간은 이래야 행복하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 문학을 위한 문학인가, 인간을 위한 문학인가?

문학은 ‘어떻게 쓰느냐’를 중요시하는, ‘문학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부류와, ‘무엇을 쓰느냐’를 중요시하는, ‘인간을 위한 문학’을 주장하는 부류로 크게 나뉜다. ‘문학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자율성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하여 문학 자체의 것만을 지키려고 애를 쓰며, ‘인간을 위한 문학’은 문학의 효율성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문학적 형식보다는 내용에 힘을 기울인다. 두 부류는 다 같이 문학의 어느 한 면에 과도하게 치우침으로써 문학을 편협하게 본다는 문제가 있다.

문학은 그러나 문학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문학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무지(無知)와의 싸움을,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꿈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과의 싸움을 뜻한다. 존재론적인 차원이나 의미론적인 차원이라는 말 때문에 놀랄 필요는 없다.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즉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문학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진실한 삶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밝혀 준다.

그리고 무의미한 삶을 자각하지 못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을 추문으로 만든다.

우리는 ‘무지’를 폭넓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이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는 것은, 무디게 갇혀 있는 일상인의 의식이 하나의 코미디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프랑스 전제(專制) 시대의 왕비를 기억하기 바란다. 그녀는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을 듣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게 아니냐고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문학은 그러한 대답이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히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렇게 좋은 글을 못 읽는 사람이 있다니!’ 문학은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 문학은 불가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에 대항하는 싸움이다.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 인간만이 몽상 속에 잠길 수 있다. 몽상은 억압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몽상은 실재하는 삶이 얼마나 억압된 삶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문학은 그런 몽상의 소산이다.

문학은 실현될 수 없는 인간의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드러낸다.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갇혀 버려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생각나무의 가지치기

사람들의 생각이란 무한한 것이고 시시각각 변화한다. 하나의 사물을 앞에 두고 몇 초 사이에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서로 얽혀 들고, 하나의 생각도 다시 갈래갈래 갈라져간다.

산문이란 그 모든 생각을 다 포용하여 가닥을 잡아나가는 것이고, 시는 처음부터 생각의 줄기를 잡아채어 끈질기게 그것의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생각나무가 있을 때, 산문은 그 기둥 줄기에 가지며 잎을 달아주면서 무성하게 키워나가는 것이다. 시는 반대로 가지며 잎을 쳐내면서 그 기둥 줄기를 하늘 높이 키워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가지나 잎은 치되, 그 나무가 진짜 나무로 보이도록 색채며, 형용이며, 특성을 탄력적으로 배치해야만 된다. 그래서 눈을 감아도 그 나무가 보일 수 있는 시각성과 청각성, 감각성을 고루 갖추어 실체화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 떠올라 시를 쓰고자 할 때, 우선 스스로의 감정을 견제하고 다스려 객관화시켜야 한다. 비논리적으로 좌충우돌하는 감정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산문에서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풀어헤치며 그 근원을 찾아가는 데 반해, 시는 처음부터 그 근원을 밝혀내고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는 추상적으로 빠지기 쉽다. 작자 자신이 확신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자기 의사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이 구체적이지가 못하고 대강 얼버무리거나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표현을 하게 된다.

시는 감정의 산물이 아니다. 그 감정을 이성의 힘으로 다스려, 언어라는 인간의 고도한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표출해내는 것이다.

창작의 기본 태도

백현국 (시인. 비평가)

많은 작품들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 습작의 수준은 놀라운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습작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창작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과 독단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각종 이론과 원론에 대한 견해의 충돌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 시대나 사조,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 어떠한 노선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문학적 환경 이해와 문학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나아가 현실에 처한 시인들은 철저한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그 인식이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각 사이트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부 습작들과 일부 기성 시인들의 작품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내용이 너무 단순성이다. 내용이 창의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시를 잘 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꽃을 아름답다고 한 시는 시라기 보다 서술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물을 보고 누구나 같은 감성으로 쓰는 것,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측면이 무시된 시어의 구사 등으로 쓴 작품은 내용의 있어 참신성이 없는 글이 되는 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창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비록 글은 세련되지 못하여도 내용은 아주 감동적일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을 말함이다. 깊이를 주지 못하면 가장 유혹 받기 쉬운 것이 바로 형식의 난해다.

둘째는 개인의 총체적인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작품이다. 깊은 사유의 틀에서 출발 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말비틀기 즉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시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의 효과음이나 언어의 모사 이미지의 변용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깊은 사유란 곧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보면 그 세계관이 어느 날 문득 깨달아지는 선禪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천착으로 나타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관을 해석해 낼만한 사유의 틀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사상寫像과 일탈된 시스템에 역이용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겪은 우리 문학계에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구체성이나 정확성이 결여된 나머지 관념적인 시를 쓰는 경우이다. 관념이란 개별 시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요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이란 적절한 시어와 효과적인 비유나 상징에 장애요소이다. 자신의 관념을 시로 옮겨 쓰다보면 각 이미지간 연결이나 시작 속에 나타나야 하는 종결의 거리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념을 시로 옮기면 알 수 없는 시어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는 데, 이는 무질서한 시어의 남발이나 무의미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시를 알 수 있으나 독자는 그 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말만 늘어놓고 아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강요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호한 표현의 문제요 적절치 않은 시어의 사용이다.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 이 시어의 사용이 적절한지, 정확한지는 반드시 따져보고 써야 한다.

넷째는 자기만 감동시키는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이다. 습작이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에 그치고 말면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습작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토로는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킬지는 모르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 가 마침내 독자의 감성을 박탈시키는 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작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보여주고 싶은 시가 주류가 된다. 보여주고 싶은 시란 결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 쪽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로 가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습작을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글의 폭력이다.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습작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공부하지 않는 습작 시인의 문제이다. 습작은 글의 기교적 측면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습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작품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절대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시 창작에 관한 공부와 사조 그리고 문학의 개론서 정도는 독파를 하고서야 습작을 하라는 얘기다.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시를 쓰지 않는 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작의 문제보다 모작을 방지하는 문제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은 모두 작품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러한 글은 비평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작품은 구조성이 중요하다. 흔히 문학 작품의 내용구조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건축물에는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구조가 대단히 중요하듯 작품에도 구조의 중요성은 중요하다. 작품은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일자시가 아닌 이상 반드시 처음/중간/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구조가 부실하면 시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상 기승전결이나 서/본/결이 단단하지 못할 때, 작품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전개하던지, 하강하던지, 아니면 처음과 끝이 연결되도록 장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각 내용과 각 연들의 내용이 서로 관련성이 없을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러한 연결 구조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주 본다.

끝으로 습작은 습작이다. 습작이란 수정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계속적인 습작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발표되어야 한다. 발표란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보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세상에 남는다는 뜻도 된다. 이는 독자들은 물론 평자들의 평가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한 때 이미 작고한 시인들의 미발표 시작을 공개하고 책으로 낸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그 시인을 욕보인 뜻이기도 하다.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성작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미발표작을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그 시인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는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창작이란 늘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아픈 작업이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심한 말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움이 길을 만든다 - 강인호

그리움이 길을 만든다

산 너머로 향한 마음이

굽이굽이 산길을 내고

바다로 향하는 마음이

물길을 내었을 것이다

내 안에도 그대 향한

산책길 하나 생겨났다

그리움이 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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