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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5163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대가 있다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다언제부터였나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인생을 .. 2025. 5. 1.
비 내리는 밤 비 내리는 밤나는 비를 맞고비는 나를 맞고비 내리는 밤길을 걸어서라도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참으로 설레는 일이다밤새 내내내 귓가에 내리는 빗소리비 내리는 밤은비가 나를 불러 같이 비 맞자고 한다- 소강석의 시집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에 실린시 〈비〉 (전문)에서 - 2025. 5. 1.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 나희덕 ​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 나희덕 ​ ​가야지 어서 가야지나의 누추함이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떨어져 구르기 전에꽃받침이 시들기 전에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빈 마음으로 가야지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나도 다시 예뻐지겠지몇 겁의 세월이 흘러그대 지나갈 과수원 길에털복숭아 한 개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2025. 4. 30.
젖은 옷은 마르고 - 김용택 젖은 옷은 마르고 - 김용택 하루종일 너를 생각하지 않고도 해가 졌다.너를 까맣게 잊고도 꽃은 피고이렇게 날이 저물었구나.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난다.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나다가꽃을 올려다본다. 무심한 몸에 핀 흰 꽃,꽃이 피는데, 하루가 저무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네가 잊혀진다는 게 하도 이상하여,내 기억 속에 네가 희미해진다는 게 이렇게 신기하여,노을 아래서 꽃가지를 잡고 놀란다.꽃을 한번 보고 내 손을 한 번 들여다본다.젖은 옷은 마르고 꽃은 피는데아무 감동 없이 남이 된 강물을 내려다본다.수양버들 가지들은 강물의 한치 위에 머문다.수양버들 가지들이 강물을 만지지 않고도 푸른 이유를 알았다.살 떨리는 이별의 순간이희미하구나. 내가 밉다. 네가 다 빠져나간내 마른 손이 밉다. 무덤덤한 내 .. 2025.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