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라
박형권
언젠가 우리는 불콰해져서 30촉 백열구를 저마다의 심장에 켜고
일찍 왔다 간 노을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시선의 끝으로 모여드는 구름들의 안부를 물으며
그날 그 자리에 오랜만에 나온 절망들과 한없이 절망하며 운 적이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육젓새우처럼 웅크리고 앉아
절망이 절망답게 발효하도록 누구를 힘껏 기다린 적이 있다
그 날을 기억하는가
실낱같은 희망보다 절망은 두툼하여 우리가 즐겨 입는 코트 위에 걸치고
광장공포증이 우줄우줄 내리는 광장으로 뛰어나갔던 일 기억하는가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 마주하였을 때
하늘은 그토록 붉어지는 것
그때의 우리 중 누군가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먼저 죽는 것들은 언제나 먼저 태어나
도시의 불빛보다 먼저 태어나
또 먼저 가버리므로 한 번 간 그리움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그때마다 저 노을이 얼마나 안쓰러워하던가
그대 옆에서 피로 저물며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위해
대신 취해주는 노을이 어부를 끌어안는 항구의 색시처럼
얼마나 안쓰러워하던가
나는 그대의 노을 위를 걷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절망처럼 빛나는 생의 반환점에서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린 그리움의 유민流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대는 비스듬히, 나는 더 비스듬히 이 저녁을 향해 걸어왔고
우리의 그리움에도 진득한 물집이 생겼다
한 생을 살고도 또 한 생이 욕심나는 저녁놀이
꽃을 꺾고 황망해져서 꽃을 던지고 황홀해졌다
아, 모든 돌이 꽃이었을 때 우리는 기꺼이 죽었다
꽃이어서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믿는 아름다움의 신도였다
그리하여 나는 ‘타오를 때까지 절망하라’고 그대에게 주문을 건다
—계간 《시와 표현》 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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