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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 김충규

by 최다원 2024. 3. 13.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 김충규

 

 

 

오늘 내가 공중의 화원에서 수확한 빛

그 빛을 몰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

남은 빛으로 빚은 새를 공중에 날려 보내며 무료를 달랬지

당신은 내내 잠에 빠져 있었지

매우 상냥한 것이 당신의 장점이지만

잠자는 모습은 좀 마녀 같아도 좋지 않을까 싶지

흐린 날이라면 비둘기를 불러 놀았겠지

비둘기는 자기들이 사람족이 다 된 줄 알지

친절하지만 너무 흔해서 새 같지가 않지

비둘기가 아니라면 어느 새가 스스럼없이 내 곁에 올까

하루는 길지 당신은 늘 시간이 모자란다고 말하지만

그건 잠자는 시간이 길어서 그래

가령 아침의 창가에서 요정이 빛으로 뜨개질을 하는 소리

당신은 한 번도 듣지 못하지 그게 불행까진 아니지만 불운인 셈이지

노파들이 작은 수레로 주워 모은 파지들이

오래지 않아 새 종이로 탄생하고 그 종이에

새로운 문장들이 인쇄되는 일은 참 즐겁지

파지 줍는 노파들에게 훈장을 하나씩!

당신도 그리 잠을 오래 잔다면

노파가 될 때 파지를 줍게 될 거야

라고 악담했지만 그런 당신의 모습도 나쁘진 않지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마부가 석탄 같은 어둠을 마차에 싣고

뚜벅뚜벅 서쪽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지 못하지만

꼭 봐야 할 건 아니지

잠자면서 잠꼬대를 종달새처럼 지저귈 때

바람 매운 날 이파리와 이파리가 서로 입술을 부비듯

한껏 내 입술도 부풀지

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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