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벗기
강태승
겨울 전에 나무는 이미 몸속에 폭설이 가득하다
무픞을 넘어 목이 턱턱 메도록 함박눈 쌓이자
할 수 없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옷자락 벗는다
정수리에 가득 찼을 때에 비로소 마지막 잎새를
놓는다 놓친다 몸속의 눈에 발목 푹푹 빠질수록
나무는 비로소 제 몸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린다
함박눈이 가득 몰아칠수록 선명해지는 나이테에
나무는 싱싱해지는 침묵으로 겨울을 걸어간다
실한 진눈깨비 다녀가면 고독에 고인 생피가,
겨우내 나이테에 음각되면 낫과 도끼 다녀가도
무너지거나 흩어지지 않는 나무의 침묵은
설령 밑동을 베어도 쪼개지거나 깨지지 않는다
다만 나무 속에 내리는 눈을 나무와 같이 맞을 때
나무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갈 때
나무 속에 내리는 눈을 나무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
나무 밖에서 내리는 눈은 나무를 굳게 한다
나무 안에서 내리는 눈은 나무를 곧게 한다
마른 북풍이 시퍼럴수록 나무 안에 내리는 폭설,
마침내 침묵마저 벗을 때에 눈발이 그친다
나무는 그제야 조용해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경칩을 건너뛰어 논둑밭둑으로 꽃을 펑펑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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