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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시론

[스크랩] 시인론

by 최다원 2010. 12. 23.
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




김수영




시의 정신과 방법? 시 쓰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시의 정신과 방법을 아는가? 그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우(愚)를 범하는 일이다. 시인은 자기의 시에 대해서 장님이다. 그리고 이 장님이라는 것을 어느 의미에서는 자랑으로 삼고 있다.




도대체가 시인은 자기의 시를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에게 눈곱재기만 한 플러스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시의 현 시점을 이탈하고 사는 사람이고 또 이탈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어제의 시나 오늘의 시는 그에게는 문제가 안 된다.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미지(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우인시(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




그의 눈에는, 소설가란 생일을 잘 차려먹기 위해서 이레를 굶는 무서운 금욕주의자다. 무서운 인내가다. 결과로서의 소설의 발언이 시의 발언과 일치되는 점도 있지만 피차의 과정이 너무나 현격하다. 그 결과를 수긍하다가도 그 과정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파스테르나크는, 현대의 상황을 대변하려면 시만 가지고는 모자란다 해서 소설을 쓰고 희곡까지 썼지만, 그의 희곡이라는 것이 따분하다. 『유리 지바고』도 그의 초기의 단편만 못하다. 그런데 그의 단편은 아시다시피 백일몽이다. <나의 『 지바고』는 왕년의 모든 시보다도 나에게 귀중한 것이다>라고 한 노후의 그의 말을 나는 신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죽는 날까지 시집만 내고 죽은 프로스트가 좀 순수하다. 파스테르나크의 초기 단편이나 딜런 토머스의 단편을 읽으면서 부러운 것은, 그들이 그런 잠꼬대를 써도 용납해 주는 사회다. 그런 사회의 문화다.



나는 여기서는 오해를 살까 보아 그런 일을 못하겠다. 여기에는 알지 못하겠는 글이 너무 많고, 그 알지 못하겠는 글이 모두 인찌끼(*부정, 사기, 속임을 뜻하는 일본 말이다)다.



알지 못하겠는 글이 모두 인찌끼인 사회에서는 싫어도 아는 글을 써야 한다. 아는 글만을 써야 한다. 진정한 시인은 죽은 후에 나온다? 그것도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만한 인내가 없다.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출발부터가 매우 순수하지 않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백은 싫다. 그렇지만 <시 1편>이라고 명기한 시 청탁서를 받을 때마다 나는 격노한다. 왜 내가 시밖에 못 쓰는 줄 아는가? 불쌍한 한국문단아!



요즈음 S잡지사의 권유로 「시 월평」이라는 걸 써보았는데, 그 바람에 시는 통 못 썼다. 시인은 심판을 받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시인이 심판을 하게 되면 불필요한 번민을 하게 된다 (남에게 얻어먹은 욕은 즉석에서 철회할 수 있지만, 남에게 한 욕은 철회하기가 매우 힘든다). 또한 사기를 한다 심판을 하자면 올가미를 씌워야 하는데 올가미에 자신까지 걸려들기는 싫다. 자기가 걸려드는 올가미는 시를 다칠까 보아 싫고 자기가 걸려들지 않는 올가미는 비평이 거짓말이 되니까 싫다. 나의 월평이 게재된 같은 잡지에 소설평을 담당한 H씨의 글에 이런 말이 나와 있다.

<.......특히나 요새처럼 작가의 정치색을 가장 날카롭게 작품 속에 구상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을 때 이러한 유행을 의식적으로 회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하고 봐야 옳을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달뿐이 아니라 지난달 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 월평을 쓰고 그분은 소설 월평을 썼다. 이 달뿐이 아니라 다음 달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 월평을 쓰고 그는 소설 월평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달에도 이 달에도 시의 현실참여를 주장해 왔고 내달에도 그것을 주장할 참이다. 그런데 아까와 같은 그분의 글을, 내가 쓴 글을 읽는 끝에 마을 가는 기분으로 읽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연 3회를 현실참여의 월평을 써온 끝이라 또 다음 호에도 똑같은 논지를 내세우는 것이 변화가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좀 의아한 생각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재빨리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그런 말을 암시해 놓았다.

<.......이러한 유행을 회피하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 그렇다.




얼마 전에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읽어면서 나는 그런 다짐을 비밀리에 하고 있었다. 그때가 벌써 S잡지사의 월평을 시작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그러니까 그 비평을 시작할 때부터 내 비상구는 만들어 놓고 쓴 셈이다. 나는 이 밀고(密告) 앞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




시인의 정신과 방법? 나는 그대를 속이고 있다. 술을 마실 때도, 산보를 할 때도, 교섭을 할 때도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속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그대를 속이고 있다.



그대가 영리한 사람인 경우에는 눈치를 챈다. 나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리한 그대는 내가 속이는 순간만을 알고 있고, 내가 속이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대는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한 그대를 구출하는 길은 그대가 시인이 되는 길밖에는 없다.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밖의 모든 책임을 시인으로부터 경감하라!


출처 : 시인의 파라다이스
글쓴이 : 채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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