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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비오는 날 우체국에 가다 - 양현근

by 최다원 2022. 1. 23.
비오는 날 우체국에 가다 - 양현근



점심 무렵, 길 건너 우체국에 가는 동안에도
내내 비가 내리고 바람이 왁자하게 불었다
길가의 은행나무 이파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풀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은행알을
풋사랑처럼 우스스 쏟아내고,
길가는 할머니들, 바닥에 떨어진 풍경 몇 장을 주으며
한 시절의 엷은 웃음을 건네고 있다
살아온 세월의 물관을 따라 가냘픈 어깨가 흔들리고
언젠가는 나의 단단하지 못한 미움도
늘 죄송하기만 한 그날의 사랑도 저렇게 끝이 날 것이라고
보고 싶은 거니? 보고 싶기나 한 거니?
비워둔 마음의 안쪽으로 우산이 밀리고
요동을 치는 가슴선의 계단을 따라
우체국 창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창구 여직원의 환해지는 얼굴만큼이나 궁금해지는 소식이며,
설익은 낙엽처럼 바스락대는 소금기 많은 외로움이며,
살다보면 어느 곳이나 틈은 있게 마련이라고
다짐만으로 사랑이 되는 일도 아니라고
우산 끝에서 또르르 말렸다가 흐지부지 풀리는 빗방울의 꼭지에서
고단한 안부가 외진 몸을 고만고만하게 견디고 있다
소식이 당도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
비어있는 우편번호란에 "가을"을 꾹꾹 눌러 써보지만
가끔 우연과 인연을 혼동하던 귀가 닳은 한 때의 시간들이
우체국 아가씨의 가지런한 웃음을 타고
아직 가지가 덜 마른 생각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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