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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하얀 달 - 권순자

by 최다원 2022. 2. 23.

하얀 달 - 권순자



그 여름 열탕 같던 감자밭을 일구고 날마다 감자꽃
자줏빛 얼굴로 잠자리에 드셨지
허약한 감자는 밤마다 신열腎熱을 앓아댔었지
어머니 지친 손발이 나무 막대처럼 흔들려
어린 감자들은 눈물 바람으로 감자꽃 피워 올려댔었지

어머니의 기력을 갉아먹던 지병은
내 가슴에 매운 연기를 피워댔었지
하초下焦의 꽃들이 쏟아지고
엎질러진 꽃들이 어머니의 꼬불꼬불한 인생길을
자꾸만 더 짙게 물들여댔었지

감자껍질처럼 말라만 가시던 어머니

아픈 날들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자
약값으로 팔려나가게 된 감자알들
노랗게 익어가던 황달 난 소녀는
달거리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먹만 한 감자알
몇 개를 훔쳤었지
캄캄한 늪 건너가는 바람처럼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던 소녀의 한쪽 발이 그만,

영문도 모르고 쏟아진 알처럼 자꾸만 굴러가던 감자알 하나
아직도 기억의 집 속을
굴러가고 있는 유월의 그 하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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