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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헌옷 도둑 - 하종오

by 최다원 2022. 11. 16.

헌옷 도둑 - 하종오



골목 모퉁이에 놓여 있는 헌옷 수거함은
뚜껑 잠긴 채 투입구만 뚫려 있었다
겨우내 헌옷만 입고 다니는 나는
이따금 갇힐까 싶어 종종걸음쳤다

평일 밤에는 슬그머니 긴 집게를 넣어
투입구로 몇 벌씩 빼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층 어패럴 공장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남자들은
긴 바지와 셔츠만 골라서 가져 가고
지하 어패럴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자들은
예쁜 속옷만 골라서 가져 갔다
빈국으로 수출한다는 수거업자는
주말 낮에만 와서 자물쇠를 풀어 뚜껑 열고
그들이 남긴 옷가지만 트럭에 실으면서
나에게 오며가며 잘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단 한 벌도 쑤셔 넣어본 적 없는 내가
헌옷 수거함에 갇히고 싶도록 남루하던 날
얼른 투입구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내가 입은 옷보다 새것 한 벌이 잡혀 나왔고
그 하루가 싱긋 웃으면서 지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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