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놀림에도 세월이 배여서 - 조태진
쉰줄의 여자는 날랜 동작으로 개불을 썰고
머리가 희끗한 그의 남자는
포장 밖을 기웃거리며 손님을 기다린다.
그림자의 움직임도 없이
조용히 취해가던 두 사내가
해삼 한 접시를 더 주문한다.
운치있게 말했는지 말해서 운치를 배웠는지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후배가
은행빚을 걱정하며 선배의 빈 잔을 채운다.
솔찬히 술잔을 비우던 후배는
보증서준 장인에게 면목이 없다하고
선배는 후배에게 면목이 없다
털복숭이 후배가 해삼을 씹으며
― 아줌마, 하루에 매상이 얼마나 오르요?
하고 묻자 무료하던 참의 그의 남자가
― 쉰찮으요 경기가 예전같지 않소!
하며 몇 마디 말을 마칠 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포장을 치고
한떼의 젊은 남녀가 포장을 들추며 들어와
경쾌한 목소리로 이것저것을 시키자
쉰줄의 여자는 낙지를 볶고 생선을 굽는다
근방의 나이트글럽이 파했을 것이다.
쌀값으로 술값을 치룬 두 사람
겨울비 내리는 자정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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