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시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 - 원재훈

by 최다원 2024. 3. 26.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 - 원재훈



소라껍질 속으로 겨울이 온다
바람도 집을 짓고
수평선 너머 더 멀리 쳐다보기만 하는 달밤
한 평생을 걸어온 나그네 같은 달빛이
백사장을 서성거린다
'거기 누구요?'
불러도 아무 대답도 없이 사라지는 썰물
지나온 시간들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엔
그대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고
나는 없다
그래 내가 없다
  
바다를 떠 담는다
주머니 속에 쏙 들어오는 작은 바다
내 마음의 그릇모양으로 담긴다
손바닥 가득히 고이는 것은
이젠 슬픔이 아니다
맨발이 시렵지 않는 어느 오후의 서해바다
더 멀리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은
몸부림치며 그리워했던
사랑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잃어버린만큼 채워지는 바닷가
아무도 슬프지 않다
  
난 잃어버렸다
난 잃어버렸다
내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반딧불이 한 마리
내 기억의 나무에 무성한 불꽃으로 타오르던
아무도 다가설 수 없었던 聖樹에 달라붙어
빛을 내는 성스러운 곤충들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고 살았습니다 -  (1) 2024.03.27
겨울나기 - 임영준  (1) 2024.03.27
그 때 - 이규경  (0) 2024.03.26
술친구 찾지 마라 - 유안진  (0) 2024.03.25
꽃의 이유 - 마종기  (0) 2024.03.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