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내민다는 거 - 최을원
버려진 자전거에 나팔꽃이 칭칭 감겨 있었다
자전거의 의지다
그렇게 목 졸리고 싶었던 거다
일산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만취한 젊은 여자가 뒤에서 목을 끌어안는다
제발 저 좀 집까지 데려다 주세요
순간, 못난 자신에게 간절히 매달려준 것이
눈물겹게 고마워
자전거는 기꺼이 목을 내민 것이다
누구나 목을 내민 적이 있다 내밀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죽는다 한 번 죽은 자들은
누구도 영원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도 나도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
횡단보도 건너편까지가 영원이다
그 여자를 데려다 주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부축하던 팔에 얹히던 왼쪽 젖가슴의 무게
세상엔 딱 그 정도의 무게로 남는 것이 있다
자전거도 녹슬고 나팔꽃도 말라죽었지만
무게는 남아
오랫동안 남아
자전거가 풀이 될 때까지
풀이 자전거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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