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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새들은 우리집에 와서 죽다 - 류시화

by 최다원 2024. 9. 15.

새들은 우리집에 와서 죽다 - 류시화



새는 공중을 나는 동안 대기를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월의 하루 동안 새가
우리집 지붕 위를 맴돌다가
갑자기 집 뒤의 빈터로 추락했을 때
나는 지구가 한 쪽으로 기우뚱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새를 떠받치고 있던
어떤 손이 치워지기라도 한 듯
새가 수직으로 빈터의 민들레밭에 내리꽂히자
우리집 식탁이 기울고
식탁에 놓인 오후의 찻잔이 기울고
순간적으로 찻잔의 물이 엎질러졌다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말하려는 듯
추락한 새의 무게는
우리집 뒤의 민들레밭을 누르고
민들레밭은 다시 도시 전체를 누르고
도시는 또다시 도시들로 가득한 세상 전체를 눌렀다
그렇게 해서 잠시 세상의 무게 중심이
한 마리 새의 죽음의 무게로 이동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새들이 그날 오후
우리집 빈터에 와서 추락하기라도 한 듯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날개를 떠받치고 있던
어떤 손이 갑자기 치워지기라도 한 듯
지구의 중심이 우리집
민들레의 빈터로
기우뚱하고 이동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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