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書畵)에서 서(書)와 화(畵)로, 그리고
서예사의 흐름을 한국 미술사라는 큰 흐름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동양화의 범주에는 한국화, 그리고 사군자와 서예가 해당한다. 특히 서예와 사군자는 용필이나 용묵에서 같은 뿌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한국화와 문인화, 서예는 미술사의 흐름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많으므로 한국화의 흐름을 짚어보는 일은 서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지, 필, 묵, 연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지닌다. 붓을 예로 들어 보면 연질의 털로 만들므로 딱딱한 서양의 연필이나 펜촉, 또는 유연성이 거의 없는 서양의 화필에 비교하여 붓 스스로의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종이는 흡습성이 강하므로 먹을 빨아들이고, 퍼지게 하는 힘이 강하다. 이와 같은 붓과 종이의 특성에 의하여 흑색만인 먹으로도 다양한 색상의 효과를 만들 수가 있다.
서양 미술과는 변별이 되는 재료적 특성은 미술에서 다른 장르를 형성하였다. 서예사를 고찰하면서 한국화의 흐름에 유의하는 이유는 재료의 공통성 때문에 서(書)와 화(畵)는 서로가 영향력을 주고, 받으므로, 서와 화의 흐름에 서로가 영향을 준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글씨와 그림이 대대로 갈마들어 일어나 어느 시대고 끊어진 적이 없는 것이다. 성정이 서로 비슷하고, 연원이 이어짐에 따라 기운이 서로 감흥일 때에는 어느 땅이고 그 차별이 없는 것이다. -(중략)- 한 집안 식구라고 일러도 좋을 것이다.”
오세창은 안중식과 아주 친하였다. 안중식은 오세창보다 겨우 세 살만 많았지만 활동의 시기로 봐서 한 세대 앞 선 서화가이다, 20세기 초의 한국 미술을 이끈 한국화가이다. 오세창은 안중식을 평하면서 “그림 각체에 뛰어 났고, 예서와 행서를 잘 썼다.”라고 하였다. 오세창의 언급이 아니더라고 당시에는 서와 화가 분리되지 않고 화가의 기본 소양으로 하나로 여겼다.(조은정외.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 p29. 대원사. 2001)
조선시대에는 서와 화를 하나의 뿌리로 보았다. 더욱이 선비들이 여기로 그렸던 문인화는 용필에서 서예와 같았으므로 붓을 쥐고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문인화 계통의 그림을 손쉽게 익혔다. 선비로서 글씨를 쓸 줄 알면 사군자를 치는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신문 기사가 고종시대의 서화가를 다루면서 서가와 화가를 구분하여 기술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대부는 글씨를 반드시 익혔다. 그러나 사군자는 여기로 익혔다, 전문 화가는 서예를 선비만큼 익숙하게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서가와 화가를 구분하기 시작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중식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화가들도 서와 화를 같이 배웠으므로 일부러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글씨를 그림보다 우선시 하고, 먼저 익혔다. 글씨를 그림보다 우위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한일 합방이 되고 난 뒤에 일본의 문화가 빠르게 흘러들어왔다. 일본에서 서예가 미술이냐, 아니냐, 라는 논쟁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서와 화의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합방 이후에 결성된 미술 단체도 이름을 ‘서화협회’라고 하였다. 서와 화는 서로 밀접하게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가(書家)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서화협회를 결성할 때도 그랬고, 조선미전에 참가를 결정할 때도 그랬다.
조선미전에서 동양화부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도영은 안중식의 제자로서 그림 뿐 아니고 글씨도 아주 잘 썼다. 이도영의 제자인 김용준이 서부에 입선한 것도 서와 화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때는 아주 자연스럽게 서화가라고 불렀다. 동양화를 공부한 이한복은 조선미전의 서부에서 입상을 여러 번이나 하였고, 서예계에서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미술사에서 그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는 서예가 미술이 아니다, 라면서 조선미전에서 서예를 제외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서예가 미술이 아니다,라는 논쟁은 조선미전의 초기에 꾸준히 대두하였다. 김진섭은 ‘제 6회 조선미전평’에서 ‘書를 버리고, 사군자를 차고 우리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주장하였다. 안석주도 미전평에서 ‘동양화를 말하기 전에 서와 사군자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그렇다고 꼭 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봉건시대의 유물이므로 남아있을 가치가 없다. 서와 사군자는 곧 조락할 것이며, 얼마만 있으면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희순도 같은 내용의 글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의 생각에 의하면, 서와 사군자는 미술이 아니다, 조선시대이 사대부들이 여기 삼아 붓장난을 하였던 것이므로 미술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이런 생각을 한 이면에는 서예를 공모전에서 제외한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선미전의 서부와 사군자부가 조선사람(한국인)의 독무대이었던 것도 이런 판단을 유발하였으리라 한다. 합방 이후에 서예계를 이끈 인물들이 이완용을 비롯하여 친인 고위 관료 출신이라는 것도 서예에 거부감을 일으켰으리고 하였다. 어쨌거나 이런 논쟁의 배경에는 전통을 봉건사회의 유물이라면서 없애야 할 낡은 개념으로 본 시대사조가 반영된 일면도 있을 것이다.
1924년에는 1부 소속이었던 사군자를 서부로 옮겼다. 친연성을 인정한 것이다. 1932년에 서예가 조선미전에서 제외 되면서 사군자는 다시 동양화부 옮겨 존속시켰다. 이것은 서예와 사군자는 한 뿌리라는 서화의 개념에서 서와 화로 분리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미전에서 서예로 여러 번이나 수상하였던 이한복이 이 과정에서 앞장 선 사실도 흥미롭다. 이한복은 미술사에서 서예가이기 보다는 화가도 더 알려진 인물이다. 이한복의 경우는 서화가 서와 화로 분리되면서 미술로서는 서보다 화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조선시대에서 일제 강점기의 초기에는 ‘서화’라는 개념이 강하였다. 1930년 대로 접어들어서 서화가 서와 화로 분리되는 과정을 겪는다. 광복이 될 때까지 서예는 미술의 무대에서 별댜른 역할을 맡지 못하고, 조용하게 보냈다.
광복이 되고 난 뒤에도 동양화는 대학에 당당하게 진입을 하지만 서예는 대학의 밖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양화의 용필법과 용묵법이 서예와 차이가 없었으므로 화가들 중에는 서예의 용필을 선호하는 작가도 나타났다. 동양화가는 표현 기법을 두고 유파를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서예가들은 대학의 바깥에서 그들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동양화가들은 한국의 특성을 지닌 그림으로서 동양화와 변별을 요구하며 한국화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 수묵 경향을 띄는 화파이었다. 한편으로는 채색을 통하여 작품을 하는 화가들이 나타나서 유파를 형성하였다.
1960년대에의 한국화단에서는 청년화가들이 ‘묵림회’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기를 들었다. 묵림회는 지표로서 반 전통, 반 조형의 기치를 내걸었다. 재래의 재료와 기법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고, 새로운 기법으로 작품 작업을 시도하였다.
서세옥과 박노수는 전통적인 문인화 정신과 현대적인 구성으로 융합하려 하였다. 민경갑을 위시한 일군의 화가들은 발묵과 파묵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이용하여 수묵이 발생적으로 나타내는 우연의 추상성을 시도하였다. 1958년에 이응노는 ‘사슴’이라는 작품에서 수묵에 의하여 조형을 표현하려 하였다. 세련된 필치로 대상을 묘사하면서 사군자를 칠 때의 활달한 필치를 적용하여 묵의 흔적을 나타내었다. 표현의 주된 방법은 먹의 농담을 이용한 것이다. (강선학. 현대한국화론. p38.재원. 1998)
한국화에서 수묵 운동을 펼친 화가는 용필과 용묵에서 가장 서예적인 기법을 운용하였다. 이들의 작업이 나중에 ‘현대서예’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서예운동을 전개할 때 중요한 지향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것은 한국화가 서예에 영향을 준 하나의 사례가 된다. 특히 서세옥의 작업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세옥은 1960년 대의 한국수묵운동에 기수의 역할을 하였다. 발묵의 기법을 극대화하여 ‘번지기 기법’이라는 것을 창출하였다. 먹이 종이와 어우러져 번져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조형을 읽으려는 것인 동시에 먹을 새롭게 이해하려 하였다. 1962년도의 작품에는 종이의 전면을 먹으로 번지게 하고, 그 일부를 언뜻 서체이 획을 연상케하는 묵선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 선을 글자로 읽을 수는 없었다. 서세옥은 ‘서예의 추상화’라는 서예 운동에서 하나의 모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서예계에서는 그의 작품을 거론하고 있지만, 서세옥 자신은 어디까지나 한국화가라고 말한다.
서세옥은 붓을 잡는 집의 분위기에서 자라났으므로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익혔다. 60년 대에 그가 시도한 것은 동양의 회화와 서예의 기법을 응용하여, 동양미술의 기본이 되는 것은 선과 점이라는 인식을 하고, 수묵 추상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었다.
그의 수묵 추상은 70년 대로 접어들면서 퇴조한다. 발묵의 흔적이 사라지면서 한국화의 수묵 조형을 의미 전달의 문자 방식으로 바꾸었다. 문자 방식으로 바뀌므로 현대 서예는 서세옥을 주목하였다.
오늘에 와서는 서세옥의 작품을 지난 시대의 미술사적 산물로 치부하고 있다.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실험으로 끝나버렸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대 서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추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70년 대는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상업화랑이 나타나면서 팔리는 그림을 찾는 상업주의에 수묵 추상은 맥없이 무너졌다고 말한다. 한국화는 고전 양식으로 회향하면서 현대성을 내세운 한국화는 퇴조하였다. 한편으로는 70년 대의 한국화가 상업주의에 무기력하게 편승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80년 대에는 다시 수묵 운동이 일어났다. 송수남이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장성 접근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70년 대의 한국화를 무조건 폄하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시장영합주의, 대중영합주의라는 비판을 넘어서서 조선조의 전통을 바탕으로 청전이나, 소정이 근대적 작업을 함으로 시장 접근이라는 맥락에서 성공하였음은 평가해주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다. 서예계는 이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더욱이 80년 대의 수묵 운동이 맥없이 무너지고, 송수남 자신도 대중영합적인 채색주의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수묵과 채색을 혼용하여 표현의 방법을 확대시킨 것은 박생광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황창배는 서예를 한 한국화가이다. 추상이 아닌 형상화를 하면서 은유가 강한 작업을 한다. 구상성이 강한 화가이다. 황창배에게서 보듯이 아직도 화가들은 서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서세옥이나, 황창배에게서 보듯이 서화(書畵)의 개념은 전통 미술에서 여전히 뿌리 깊게 잔재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80년 대의 한국화의 흐름은 대체로 두 줄기로 볼 수 있다.
“수묵의 흐름은 흔히 필선에 의한 표현이 즉, 필획 쪽에 치중했던 작가들(송수남, 홍석창, 홍용선, 신산옥 등)가 방만하게 필획을 풀어헤쳐진 필흔 즉, 보다 수묵 표현의 확대를 위주로 했던 작가들(이철량, 박인현 등)이 흐름의 주류를 이루었다.(홍용선. 환원과 확산. 이일교수회갑기념논문집. 1992)
수묵화는 고전적인 정신성과 현대적인 조형성을 접목하여 조화를 이루어내기를 바랐지만, 생경한 화면 구성을 함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묵과 채색을 사용한 한국화는 단순히 조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함으로 지나친 감각주의로 흐른 경향을 보였다. 채색의 도입은 일본 회화의 감염으로 보았고, 화면 구성에서는 지나치게 서양 회화적이라는 우려를 자아냈다.
지금까지 한국화의 흐름을 살펴 본 결과는 서예의 흐름을 미리 예견한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서예의 흐름을 되돌아 보자.
서예가 미술이냐는 회의적인 시각에 시달리면서 숨을 죽이고 있던 서예가 광복을 맞이하자, 과감히 ‘서예’로 명칭을 바꾸면서 도약을 꿈꾼다.(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영향으로 서도라고 하였다.) 서예에도 미의 개념을 도입하여 조형미를 추구하면서 예술의 장르로 뛰어 들었다. 이때 만해도 서와 화의 분리가 철저하지 않았으므로 동거의 형태를 취했다고 할까. 서예에 회화성 도입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서예가 조형미를 추구하면서 미술을 향해 나아갈 적마다 법파(法派)의 강력한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전통 서예가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지 못 하고 대중으로부터 멀어지자 서예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조형미 추구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현대서예가 태동하는 배경이 되었다. 손재형과 유희강이 시도하였던 서예운동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8-90년 대의 서예 운동은 전혀 다른 방식을 시도하였다. 서예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문자에 의한 의미 내용을 해체해 버렸다. 한국화에서 서세옥이 시도하였던 선의 추상성을 그대로 본 받아서 추구하였다. 그러나 선의 추상성 추구는 예술성도 대중성도 확보하지 못 하였다. 서예가 갖고 있는 본래의 정신성을 선의 추상성 표현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었다.
서예가 추상성을 추구한다고 하여 전통 서예가 갖고 있는 문자의 의미 내용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방법으로 사의 형식을 표현해 낼 수가 없었다. 문자의 의미를 해체해버린 서예는 추상적인 방법으로 사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전환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서양의 추상 회화의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서예가 아닌 추상 회화일 뿐이었다.
물파(物派)라는 이름을 내걸고 ‘선의 미’를 강조한 서예 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까닭이기도 하였다. 서예가 나타내는 의미는 동양적인 사고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양인이 말하는 추상성으로는 동양적 사유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문인화와 서예가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2000년을 접어들고서 부터이다. 서예와 문인화는 ‘서화동원’ 이론에 의하여 가장 친화성이 강한 장르이다. 실제로 지난 날에는 서예를 한 사람은 대부분이 문인화를 할 줄 알았다. 서예의 용필법을 익힌 사람은 손쉽게 사군자를 익혔다.
90년 대에 접어들면서 한국화에서 수묵 운동도 시들해진다. 수묵화를 대체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채색화이다. 다양한 양상의 채색화가 나타난 것은 이때이다. 수묵과 채색이 공존한 것이 90년 대의 한국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 대가 되어서도 80년 대의 수묵화의 잔영이 오래 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수묵과 채색을 동시에 표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 것이 대세이기도 하였다. 다시 표현 방법과 사용하는 매체에서 자유로운 선택이 나타났고,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지필묵에서 벗어나서 아크릴릭, 유채. 파스텔, 뿐 아니라 꼴라쥬까지 나타났다. 표현된 결과물의 양상은 신형상주의, 신표현주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특징까지 선 보였다. 일부에서는 과연 한국화라고 할 수 있느냐,는 반문도 있었다.
서예에서도 이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김태정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지필묵을 매체로 하는 서예로 되돌아 왔음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시도는 강력한 채색 효과를 내는 단청, 민화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전통 설화와 전통 신화를 도입함으로 한국적 정서를 강하게 자극하는 양식을 취하였다. 이 방향으로 나아간 화가는 사석원을 꼽을 수 있다. 과슈를 위시하여 최근에 개발한 서양화의 물감을 사용하여 강렬한 채색으로 감상자를 자극하였다. 그러나 한국적인 설화나 한국적인 풍광을 그려내므로 한국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도 처음에는 장르의 파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화가 외면을 받던 미술시장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서예가 강력한 채색을 사용하는 한국화 앙식을 받아들이기에는 장르나, 표현 앙식에서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러나 시장성도 예술성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서예계도 한 번은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서예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한국화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화가 양식상으로 부침을 하는 과정을 서예도 따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90년 대에 현대 서예가 표방한 선과 먹에 의하여 추상성을 추구하는 것은 한국화에서 이미 80년 대에 실험을 거친 후에 90년 대에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양식이다. 한국화를 되돌아 보면 충분히 예견이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사군자가 서예에서 분리하여 한국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서화 동원론은 서법과 용필과 용묵에서 같다는 것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서와 사군자의 분리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은 분리하였다. 이것은 사군자가 뛰쳐나간 것이다. 서예와 한 울타리에서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강햐였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에 제 1회 대한민국 문인화 대전을 개최함으로 서화는 서와 화로 분리를 완성하였다. 지금은 서예와 분리되고 나서 아예 서예의 용필법은 공부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사군자를 하는 사람이 서예의 기법을 잊어버렸다는 김양동의 따끔한 지적도 있었다. 예전처럼 서(書)로 화제를 담아내지 못 하고 사군자 치는 법만 익혀서 그림만을 그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각도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함으로 전통 사군자와는 많이 멀어진 상태이다. 사군자가 과감한 채색을 사용하고,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고 있으므로 서예보다는 한국화와 더 친연성을 가지는 것도 현실이다. 서화가 서와 화로 분리됨으로 서예는 더욱 더 고립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수첩 서.화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낙관이란 무엇일까 (0) | 2014.07.23 |
|---|---|
| [스크랩] 예서의 발생에 관하여 (0) | 2014.07.23 |
| [스크랩] 中鋒에 관한 小攷 (0) | 2014.07.22 |
| [스크랩] 미술치료의 개념과 견해 (0) | 2014.07.19 |
| [스크랩] 손과정의 서보에 있어서 창조의 문제 (0) | 2014.07.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