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첩 서.화론

[스크랩] 예서의 발생에 관하여

by 최다원 2014. 7. 23.

일반적으로 중국의 문자 발전과 서예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갑골문에서 전서에 이르는 시기는 서예의 부자각(不自覺) 시기로, 예서 이후를 서예의 자각시기로 나눕니다. 즉 부자각시기는 고문자(古文字)의 시기이며, 주로 실용적, 의식적 측면에서 서사행위가 이루어 졌고, 예서 이후는 금문자(今文字)의 시기로 예술적인 측면에서 서예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서는 언제 발생했을까요?
예서의 기원에 대해서 역대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특히 창시자와 시작 시점에 대해서 다른 견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정막(程邈)이 예서를 창시했다는 설(당나라 장언원의 <<법서요록>>:예서는 진나라 하규사람인 정막이 만들었다) 등이 있지만, 20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자료에는 진시황이 통일을 이루기 전에 이미 초기 예서가 존재했다는 자료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첫째, 진대(秦代)에 예서가 창시되었다는 설과 둘째, 진대 이전에 예서가 창시되었다는 설로 나누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진대(秦代)에 예서가 발생했다는 설
한나라 허신의 <<설문해자,주>>에 보면, "...이 때(진시황 시대)에 처음으로 예서가 생기게 되었고, 고문은 이로부터 끊어지게 되었다..." 라는 글이 있고, 진(晉) 위항(衛恒)의 <사체서세(四體書勢)>에는 "진(秦) 나라에서는 이미 전서를 사용하였는데 주사(奏事)가 많아짐으로서 전서로는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예인(隸人)들로 하여금 서(書)를 돕게하니 예자(隸字)라고 하였다....예서는 전서를 빨리 쓰기 위한 것이다."라는 글이 있는가 하면, 당나라 장회관(張懷瓘)의 <<서단(書斷>>에는 "예서는 진나라 하규사람 정막이 만들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예서는 진시황의 진나라 때 이미 사용되었고, 진나라 관청이나 감옥의 업무량이 많아서 서사속도가 느린 전서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간편하게 빨리 쓸 수 있는 글자체인 예서의 필요성과 진나라 죄수의 무리들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예서(隸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옥중에서 정막이란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진나라 때 예서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과 실용성적인 측면에서 공식문자였던 전서보다 우위에 있었고, 정막은 이사가 소전을 정리한 것처럼 예서 정리에 공을 세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둘째, 진대 이전에 예서가 시작되었다는 설
오늘날 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와 출토된 각종 고문자 자료를 보면 비교적 진대 진시황 이전에 예서가 있었다는 설에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경의 문자학자인 구석규는 "예서는 이미 전국시대에 기본이 형성되었다."라고 주장하는데 1989년 발굴된 전국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사천성의 <청천목독(靑川木牘)>은 이른 시기의 예서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포산목간(包山木簡)>은 전국시대 중만기인 기원전 316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근들어 속속 발굴되는 간독자료로 인해 예서의 발생에 대한 시점은 진나라 정막이 창시했다는 진나라창시설 보다 앞 시기인 전국시대 혹은 그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실증자료는 지면상 여기서 전부 밝히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쓴 논문을 비롯해 몇 편의 논문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무심헌 정태수 씀

..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