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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변신의 시간 - 심보선

by 최다원 2024. 1. 19.

변신의 시간 - 심보선



아무 거리낌 없이 인생은 시작됐다
어린 나뭇가지들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죽어갈 때
나는 양미간을 찌푸려
그 가냘픈 육신들을 이마 위에 옮겨 심었다
시간의 무덤에 꽃과 향과 초를 바치는
번제燔祭의 밤마다
나는 백일치의 기억을 불태우곤 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늙어갔지만 늙어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죽기는 싫었다
모든 방황은 무익했으며
모든 여행은 무가치했다
파도의 음계는 어느 바다인들 다르지 않았고
구름의 울음은 어느 그림자도 흔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어이 머물 수 없음이여
또한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이여
오래전 길 위에서 만난 어느 현자는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일만 사천 개 섬들은
모두들 하나씩 화산구를 지니고 있다네
그대는 멸망으로 나아가는 그대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오래된 현자의 말을 떠올렸지만
하얀 얼굴로 밥을 떠먹는 너를 바라보며
강퍅한 결심 하나를 몰래 거두어야 했다
너는 내 옆에서 아이처럼 잠들었다
잠든 너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인간의 침묵에서
벌레의 침묵 쪽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멸망에 관한 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미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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