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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젖은 옷은 마르고 - 김용택

by 최다원 2025. 4. 30.

 

젖은 옷은 마르고 - 김용택

 

 

 

하루종일 너를 생각하지 않고도 해가 졌다.

너를 까맣게 잊고도 꽃은 피고

이렇게 날이 저물었구나.

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난다.

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나다가

꽃을  올려다본다. 무심한 몸에 핀 흰 꽃,

꽃이 피는데, 하루가 저무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

네가 잊혀진다는 게 하도 이상하여,

내 기억 속에 네가 희미해진다는 게 이렇게 신기하여,

노을 아래서 꽃가지를 잡고 놀란다.

꽃을 한번 보고 내 손을 한 번 들여다본다.

젖은 옷은 마르고 꽃은 피는데

아무 감동 없이 남이 된 강물을 내려다본다.

수양버들 가지들은 강물의 한치 위에 머문다.

수양버들 가지들이 강물을 만지지 않고도 푸른 이유를 알았다.

살 떨리는 이별의 순간이

희미하구나. 내가 밉다. 네가 다 빠져나간

내 마른 손이 밉다. 무덤덤한 내 손을 들여다보다가

네가 머문 자리를 만져본다.

잔물결도 일지 않는구나. 젖은 옷은 마르고

미련이 없을 때, 꽃은 피고

너를 완전히 잊을 때, 달이 뜬다.

꽃이 무심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사랑은

한낱 죽은 공간, 네 품속을 완전히 벗어날 때 나는 자유다.

네 모습이 흔들림 없이 그대로 보인다.

실은, 얼마나 가난한가. 젖었다가 마른 짚검불처럼 날릴

네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꽃이 때로 너를 본다는 걸 아느냐.

보아라! 나를

너를 까맣게 잊고도 이렇게 하루가 직접적인 현실이 되었다.

젖은 옷은 마르고, 나는 좋다.

너 섰던 자리에 꼭 살구나무가 아니어도 무슨 상관이냐.

이 의미가, 이 현실이 한밤의 강을 건너온 자의 뒷모습이다.

현실은, 바로 본다는 뜻 아니냐. 고통의 통과가 자유 위의 무심이다.

젖은 옷은 마르고, 이별이 이리 의미 없이 묵을 줄 몰랐다.

꿈속으로 건너가서 직시한 저 건너

현실, 바로 지금 이 순간 꽃은 피고

젖은 옷은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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