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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서.화론

[스크랩] 도곡 김태정선생 "서예의 조형적 사고"

by 최다원 2014. 8. 13.

구성의 중요성

 

동양 서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묵이다.

이 필묵이 되어있지 못하면 서화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므로 아무리 다른 조건이 잘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뛰어난 작품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마음이 비뚤어진 상태에서 공부를 하면 남을 속이는 꾀만 느는 현상과 같은 이치다.

근본이 안된 상태에서 꾀만 늘게되면 예술계에 조미료만 뿌리게 되고 결국 예술의 건강을 해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럼 과연 필묵이란 무엇인가?

필묵과 필법의 관계는 무었이며 필력과는 무슨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우선 법을 알아야 한다.

점 하나 선 하나의 정확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필법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필법을 모르고 가면 우물쭈물 구렁이 담넘어가는 식이어서 획이 가라않지못하고 부풀거나 뜨게 된다.

필획이 종이를 거머쥐지 못한다.

이것을 막으려면 먼저 안필(按筆)과 제필(提筆)의 연계 작용과 손 방향 전환의 동시작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 연결 동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필에서 이미 먹의 퇴적(堆積) 현상이 일어나서 기운생동이 되지 않으며 행필에서도 리듬과 가락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게 되므로 자연히 획이 축 늘어져서 기맥을 상실하게 된다.

행필에서의 리듬이다 가락이다 하는 말은, 틀에 박힌 삼과절(三過折)이나 초보적인 운필방법의 기억에서는 순기자연(順氣自然)하지 못한다.

두 번 쉬느냐 세번 쉬느냐 하는 것은 기억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내 몸의 피가 돌아갈 때, 직선거리와 굴곡에서 그 쉼이 달라지듯이 스스로의 체질이나 호흡에 맞게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옛날 고전에도 이를 강조했거니와 실제의 법첩에서도 한획에서 일곱번 여덟번을 쉬어가면서 붓을 일으켜세운 예를 찾아 볼수도 있다.

 

어떻게 가느냐, 몇번을 쉬느냐 하는 것은 생각이나 기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연마를 통해 법을 깨닫게 된 후부터 만나게 되는 인연이다.

이 인연이 오지 않으면 제아무리 법을 지켜 쓴다 해도 좋은 획을 기대하기 어렵다.

방법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방법만을 찾거나, 그 방법 정도의 테두리에만 머문 사람에게는 무서운 함정이 있는 법이다.

방법을 최고로 아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방법정도는 익히게 될 것이지만, 방법을 익힌다음에는 곧 그 방법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을 모르고 지내기 마련이다.

법이다 하는 것, 법을 안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법을 알면 모양이 제대로 잘 다듬어지니까, 그 모양 만드는 재미에 빠져 있는 제 스스로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법만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 위에 사람이 없는 걸로 안다. 모양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잘 다듬어지니까 제가 천하명공인 것처럼 안다.

이 오만한 마음이 바로 스타일리스트를 만든다, 잘쓴다, 법에 맞게 쓴다는 사람의 필묵에는 항상 火氣가 뻗치기 마련이다. 신나게 잘 쓴다, 필력있게 쓴다라고 하는 세상 사람의 말에는 원래 무서운 가시가 있는 법이다.

쓰지 못한다 해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쓰지못하면서도 느낌이 정직한 스승은 얼마든지 있다.

운동경기장에서 심판은 자기가 가장 정확한 심판자인줄 알지만, 멀리서 관전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 심판의 바보짓이 얼마나 잘 보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글씨 나부랭이 쓰는 걸로 제가 잘나면 얼마나 잘 났냐 하는 줄은 모르고, 안하무인격으로 우쭐대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방자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필묵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필법만 알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획가운데 묻어나오는 규각(圭角)을 감지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 마음 다스리는 일까지 겸하게 되면 드디어 필력이 획의 내장으로 파고 들어간다. 잘 꾸며서 우아한 것보다는 꾸미지 않아도 우아한 그 깊이와 중량감이 중요한 것이다.

필묵의 훌륭함이란 이런 데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시간을 당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마음과 학문을 아울러 닦아서 얻어지는 것이어서 옛사람들이 독만권서(讀萬券書)니 행만리로(行萬里路)니 하는 이유가 다 그것이다.

필법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오는 무서운 시련을 이기지 못하면 역시 비범(非凡)에 이르지는 못한다. 깨달음이 중요하지만, 그 깨달음을 닦지 않으면(頓悟漸修), 썩은자루에 날이잘선 도끼를 휘두름과 다를 게 없다는 고승의 말이 과연 그러하다. 필묵이 이렇게 중요하지만, 그러나 필묵만으로 예술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필묵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구체화하느냐 하는 것은, 그 필묵을 짜는 조직에 대한 고심과 날카로운 포국(布局)에서 성패가 가려진다. 지난날의 관념으로 보면, 필묵만으로 자연스럽게 써 나가기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리되면 옛사람의 표정을 지우기가 어렵다. 이것을 이기는 방법, 즉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표현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전통적으로 말하자면 경영위치(經營位置)이고 지금 말로하면 구성(콤퍼지션)이다. 필묵이 아무리 좋아도 이 능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영원히 고전의 종살이를 면하지 못하고 만다. 생각만 크고 욕심만 들이찬 한량이나 일하지 않고도 잘 살기를 바라는 부랑자나 다를 바 없다.

실로 구성(콤포지션)은 현대미술의 성패를 가늠하는 요체(要諦)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고)원교 이광사의 예서

 원교의 법첩 종지(宗旨)를 쓴 것인데 예서의 자형과 획법을 따르면서 일부 해법을 가미하였으며, 법법 자에서 삼국시대 이후의 자형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원교가 한위예비(漢魏隸碑) 중에서 높게 평가하였던 예기비의 결구와 획법을 따랐다.

원교는 서결(書訣)에서 "비백(飛白)은 용필(用筆)과 조묵(調墨)이 어렵고 또 가볍게 지나가면서 경건(勁健)함을 잃지 않아야 하므로 획력(劃力)이 크지 않으면 능할 수가 없다" 고 하면서 후세에 비백의 전통이 끊어지고 법이 무너졌음을 개탄하였다. 원교는 작첩(作帖)할 때에 대자로 비백을 간혹 썼는데, 솔솔 바람이 통하면서 필획의 근간을 잃지 않았다.

 

출처 : 경산 청림서예원
글쓴이 : 청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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