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춘추전국시대는 주왕실의 동천(기원전 770년)에서 秦진의 중국통일(기원전 221년)까지 약550년 간을 말한다. 더 세분하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할 수 있다. 즉 周주의 동천에서 晋진이 三分되어 韓한, 魏위, 趙조가 독립했던 기원전 453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하고 그 이후부터 秦진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 초기에 열국의 수효는 대개 100-180여 국으로 추정되고, 鄭정, 魯노, 宋송, 魏위, 趙조, 陳진, 齊제, 晋진, 楚초 등이 서로 다투었고, 주왕실은 이미 무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줄어들어 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서예의 흐름상 서주만기가 되면 제후들이 제작한 금문이 나타난다. 춘추시대는 바로 제후들이 제작하는 금문들이 시작되고 황하강 중류유역의 200여 열국이 무리지어 도시국가를 이루어 세력이 확대되거나 병합된다. 그 중에서도 힘이 강성해 패권을 주창하는 국들이 등장하니 영토와 국가가 통합되는 시기였다. 주왕실은 종주(宗主)로서 인정되었지만 실권은 힘이 강한 오패(五覇)로 옮겨가니 기원전 770년에서 약 3백여년 동안 이런 형세를 이룬다.
2. 五覇오패의 출현
오패가 어느나라인지 이론이 분분하다. 일반적으로 齊제의 桓公환공, 晋진의 文公문공, 楚초의 莊王장왕, 吳王오왕 夫差부차, 越王월왕 勾踐구천을 五覇오패라고 한다. 춘추시대에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나라는 鄭정이었다. 그 뒤 양자강 유역 남방의 강국인 楚초가 대두하자 중원의 제후를 규합한 齊제가 대항하였다. 기원전 658년에 초나라가 마침내 중원의 강국이었던 鄭정을 침범해 춘추시대 남북대립의 장을 열었다. 齊제의 桓公환공(기원전 685-643년)은 제후를 소집해 楚를 물리치고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 환공이 죽은 후 패자를 이어받은 사람은 晉진의 文公문공(기원전 636-629년)이었다. 문공의 사후에는 楚초의 莊王장왕이 패자가 되었다. 초가 패자가 됨으로써 남북항쟁이라는 춘추시대의 세력판도가 본격화된다. 기원전 6세기 중반 중원에서 晋진, 楚초 양대국을 중심으로 남북간이 다투고 있을 때 양자강 이남에서 吳오와 越월이 흥기하였다. 이른바 吳오의 夫差부차와 越王월왕 句踐구천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에서 전하듯이 오를 멸망시킨 월도 구천의 사후 세력이 약해져 초에게 멸망하였다. 이후에는 양자강 유역의 초와 중원의 晉진 사이에 각축이 벌어졌고, 여기에 산동의 齊제와 서주의 옛 땅에 자리잡은 秦진이 강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춘추시대는 하극상의 시대로서 정치적 전란과 항쟁이 많은 시대였다. 경제적으로는 철기(鐵器)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생산력이 증대되고 정신문화의 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따른 시기였다. 춘추라고 부르는 이름은 공자가 편찬한 노국(魯國)의 년대기인 『춘추春秋』에서 비롯된다.
3. 춘추전국시대의 금문
이 시기 나라의 중요한 일들은 청동기에 명문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서예자료는 주로 금문에 남아있다. 그러나 서주의 기물과 비교하면 제작상 간단하고 명문의 내용도 감소된다. 전대에 비해 이 시기 금문의 서풍은 복잡한 양상이 드러난다. 청동기는 동서남북중의 다섯 계통으로 나뉘어지며 전하는 청동기의 수량도 상당한 량이다. 또한 이 시기의 금문에는 서풍의 지역성이 나타난다. 특히 晋, 楚, 齊 등의 금문에서 지방색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이 중에서 북쪽에 위치한 晋나라의 금문에서는 머리부분이 뾰족하고 배가 살찐 올챙이와 같은 문자가 나왔는데 <智君子鑑>이 대표적이며 이런 문자를 ‘과두문’이라고 한다. 남방에 위치한 吳, 越, 楚나라의 글자에는 항상 새의 형태를 장식하였기 때문에 ‘鳥書조서’라고 부르는데 획의 굴절이 많고 꼬리를 길게 뺀다. 곽말약은 이에 대해 “의식적으로 문자를 예술품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혹은 문자 자체를 장식화하려는 의도는 춘추말기부터 시작되었다. 문자가 서예로 발전하려는 의식적인 단계”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춘추시대의 전기와 중기는 서풍상 지역적인 특색이 구별되나 후기 이후에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춘추시대 전기의 금문에서 보이는 나라는 宋■衛■杞■魯■費■薛■陳■許■胡■番■江■黃■毛■芮■齊■紀■鑄■蘇■曾■吳■楚 등이다. 이 나라의 금문들은 일반적으로 서주후기 서풍의 연장선상이다. 서주시기에 비해 춘추시대 제후국들의 금문은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향성을 보이기도 하는데 예컨대 설薛의 그릇[器]에 나타나는 것처럼 획이 그다지 굵지 않은 특징이 있다.
중기의 서풍은 鄭■魯■陳■曾■紀■晋■齊■秦의 문자에서 보인다. 패권을 주창하는 강국의 문자도 기교적으로 세련된 편은 아니다. 중기와 말기에 청동기 위에 금속을 붙이는 錯金工藝착금공예가 출현하여 명문을 청동기 표면 위에 붙인 작품들이 많다. 晋의 <난서부欒書缶>는 최초의 착금명문으로 매끄러운 선에 화려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난서부는 난서가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담던 용기로 그릇의 몸과 덮개에 각각 네 개의 고리가 있는데 이 紐(고리)에는 경사진 각도로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릇의 목에서부터 윗배부분에 금실로 글자를 박아넣은 착금으로 5행 40자가 새겨져 있다. 착금을 한 명문은 춘추중기부터 보이는데 보통 병기에 많이 하였으며 글자는 몇 자에 불과하다. 난서부와 같은 장편의 명문이 있는 것은 드물다. 이 명문은 정갈하고 아름다우며 위치도 금방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장식성이 있다. 획은 둥글고 글자는 세로의 형세를 하고 있으며 필획은 부드럽게 꺽여 윤택해 보인다. 이와 같이 착금법이 등장하면서 상나라와 주나라의 명문이 그릇의 내부에 주물을 이용해 새기는 것과는 다르게 그릇의 외부 잘 보이는 곳에 명문을 붙이는 방법이 나타난다. 齊의 <子中姜■>는 장방형의 자형에 정제된 서풍이고, 秦의 <秦公鐘>은 전서[秦篆]의 원형이다. 楚의 <壬子午鼎>은 유려하고 기괴한 남방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형은 춘추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착금명문은 전국시대에 접어들면 더욱 발전한다. 예컨대 <鄂君啓銅節악군계동절>과 <會候乙墓甬鐘회후을묘용종>과 같은 것은 병기 위에 착금을 한 명문이다. <악군계동절>은 1957년 안휘성 壽縣의 어느 집 화원에서 출토되었다. 銅節 5개가 나왔는데 갑을 두 개조로 나눌 수 있다. 갑조는 현존하는 2개의 舟節로 일종의 수륙통행증으로 밝혀지고 있다. 을조는 현재 3개가 존재하고 있는데 車節로 모두 모양이 죽절과 합해진다. 이 <악군계동절>은 초나라 懷王(기원전 328 - 기원전295) 때 호북성 鄂城악성에서 발급되었던 수륙통행증으로 회왕 6년(기원전 323년)에 만들어졌고 형태는 죽절을 쪼갠 형태와 같다. 길이가 약 30㎝, 너비가 약 7㎝로 정면에 음각으로 9행이 새겨져 있고 매행 마다 착금을 한 명문이 있다. 명문의 내용은 회왕이 악군계의 판로에 대하여 가끔 규제를 하였던 것으로 수레와 선박의 숫자, 그리고 통행 노선 및 화물의 적재량과 관세의 징수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명문은 초나라 임금이 제후로 봉했던 나라와의 관계와 상업, 교통, 운수 및 지리 등 당시의 경제발전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명문의 글씨는 둥글고 윤택하며 수려하고 굳센 느낌이 있어서 착금명문 가운데 좋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전국시대에는 청동기 위에 직접 명문을 새기기도 하였는데 이 때 철기가 광범위 하게 사용되어 날카롭고 뾰족하게 새겼다.
전국시대 중산왕 묘지에서 출토된 <중산왕석정>의 명문은 자형이 고르고 대칭을 이루며 굳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글자의 형체가 긴 것이 특징이다. 전국시대에 있어 中山은 춘추시기의 鮮虞이다. 1974년 이래 하북성 平山縣에서 중산국의 옛터가 발굴되었는데 <중산왕석정>은 서령산의 1호대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쇠다리가 붙어있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높이가 51㎝, 솥둘레에 77행으로 모두 469자가 새겨져 있다. 이 솥은 중산왕 석 14년에 주조하여 상으로 내린 것이다. 전국시대 청동기 중에서는 문자가 가장 많아서 서주시대 <모공정> 다음이다. 명문의 풍격은 글자의 형체가 길고 고른 대칭과 유창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춘춘전국시대의 금문은 서주시대의 무겁고 그윽한 금문의 풍격을 일신하여 두텁고 아름다운 풍격에서 다시 가늘고 날아갈듯 아름다운 맛이 첨가되어 있다. 글씨의 모양도 길거나 행필이 둥글면서 부드럽고, 착금이 성행한 것도 특징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