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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서.화론

[스크랩] 서예를 공부하는 방법

by 최다원 2015. 3. 18.

              서예를 공부하는 방법

  서예는 예술이다. 예술의 속성인 창작과 연계되어 있다. 창작은 창신(創新)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서예의 특수성이라고 할까. 창신이라고 하여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흔히 법첩(法帖)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통적인 서예 이론이다. 고전 즉 법첩은 서예인에게 학습의 대상이고, 창작의 지도서이다. 서예 창작을 위해서 고전을 배워야 한다. 서예 이론 책에서 발췌하여 짜깁기로 요약해 보았다.

“서예 학습은 고전 즉 전통서예에서 형태미와 서예정신을 발견해야 한다. 고인들의 명적을 통하여 필법과 조형 원리를 배운다. 또 서예사와 서론(書論)을 통해서 서예정신과 역사의식을 배워야 한다.”

   다시 서예 창작의 방법론을 김희정의 책에서 인용하겠다.

“조형의 원리를 터득하기 위한 전통적인 학습방법으로 임모(臨摹)가 있다. 임모를 흔히 임서(臨書)한다, 하는데 이보다는 임모한다 하는 것이 옳다. 임모는 임서와 모서를 합한 말이기 때문이다. 임서는 법첩을 옆에 놓고 형세를 관찰하며 베껴 쓴다는 것이고 모서는 글자 위에 투명한 종이를 덮고 아래에 비친 글자를 그대로 본뜨는 것이다. 임서는 글자의 형세를 익히기 좋고, 모서는 글자의 짜임새를 익히기 좋다. 그러므로 처음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은 임서와 모서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서예를 공부하는 방법으로 임모를 말하였다. 임모가 단순히 글자의 짜임새와 형세만 익히는 것이 아니다. 글자가 의미를 가지는 기호로서 소통되도록 규칙을 배운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술작품을 임모로 만들어라, 는 뜻은 아니다. 고전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는 것은 창작이 아니고 표절이기 때문이다. 창작하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술적 표현이란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작품에 의탁하여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작가가 개성적인 인간이고, 작가의 개성적인 표현이라면 작가에 따라서 작품을 달라야 한다.

 

  위의 설명을 현대 예술이론으로 재해석해보자. 예술 작품이 의미를 만드는 것을 언어이론으로 설명하였다. 언어는 표상하는 단어나 문장이 있고, 단어나 문장은 뜻(의미)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언어로서 역할을 하려면 말하는 사람의 말이 듣는 사람에게 뜻(의미)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공유하는 언어 법칙에 맞추어 문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만이 문학작품이 된다.

  임모는 글씨를 쓰는 사람이나 글씨를 읽는 사람이 공유하는 글씨의 법칙을 익히는 것이다. 의미가 소통되기 위한 법칙을 배우는 것이다. 법칙을 공유해야(요즘 말로 코드가 맞아야)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의미의 소통이 가능해진다.

 

중국 미술사에서 옛 작품을 본뜨는 것을 복고주의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맹부이다. 청초의 화가 사왕(四王)도 복고주의 화가라고 한다. 조맹부의 고의론(古意論)은 옛날의 회화로 돌아가지는 뜻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새겨보면 송나라 때의 원체풍 회화가 섬세하고, 채색이 아름다워서 눈으로 보고 즐기기에 좋아 화가들이 원체풍의 회화만을 그린다. 이것은 옳지 않다. 당나라의 그림으로 돌아가자, 라고 하였다. 당나라 그림이란 사의화를 말하므로 겉모양이 번지르르 하다고 외양만 따르지 말고 의미를 담자는 뜻이다. 형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감상자에게 전달이 되는 의미를 담자는 것이다. 조맹부를 자세히 읽어보면 복고주의도 옛 것을 반복하자는 것은 아니고 형태보다는 의미 전달을 중시하자는 뜻이 강하다. 서예의 창작에 임모를 주장하는 것은 현대 미학이론으로 보자면 법칙을 배우자는 것이다. 법칙에만 매달리면 창의력이 떨어진다. 서예가 의미를 어떻게 담아서 감상자에게 전달해야 할까? 글자의 형태만 익혀서는 어딘가 미흡하다.

 

  서양 미술사에서도 미술을 미술학교(아카데미)에서 기법을 가르치므로 너무 형식적으로 흘러가고 창의력이 떨어진다면서 비판이 나타났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인상파를 위시한 새로운 화풍이 나타난 것은 아카데미 미술에 반기를 든 화가들이 주도하였다.

 

  서양의 미술 교육은 뎃생을 기본으로 한다. 미술대학에서는 뎃생을 실기 시험으로 치른다. 미술대학을 꿈꾸는 아이들은 초등하교 때부터 학원에 가서 데생을 공부한다. 서양의 인물 조각상을 그리고, 또 그린다. 10년 이상 연습을 하다 보니 손에 익숙해져서 습관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때는 창의력이 나올 수가 없다. 미술은 창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가장 비 창작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하였다.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보겠다. 대구의 Y대학 미술학과에서 입시 시험에 뎃생 실기를 하였다. 시험관이 ‘아그리파’ 두상을 15도 쯤 돌려서 놓고 그리도록 하였다. 상당수 학생이 학원에서 배운데로 정면으로 그려서 제출하였다. 습관이란 사실을 바로보지 못하게 하는 수도 있다.

 

  서울의 H미대에서는 뎃생이 학생의 창의력을 없앤다고 하여 입시에 뎃생 실기를 없애 버렸다. 대구에서도 G 대학 미대에서 없애려고 하였더니 대구 시내의 미술학원가에서 거센 반발이 있었다. 학생을 G 대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하여 포기하였다는 말을 교수님께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변화를 꾀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서예 작품을 만들면서 임모가 창작에 옳지 않다는 것을 알더라도 고치는 일이 쉽지 않다. 서예 학원에 공부를 하러 가면 학습법이 임모법이기 때문에 창작은 없고 표절만 배우는 꼴이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손재주만 배운다. 감상자들도 전시장에 들려서 잘 쓴 글씨보다 낯설게 표현한 글씨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학적 글쓰기에서 표현 방법은 일상의 글쓰기와는 다르다. 그래서 문학적 표현이란 말을 낯설게 하기라고 말한다.

 

  주변의 서예인이 흔히 하는 말이 서예를 10년 쯤 하고나면 회의를 느낀다고 하였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실망하고 그만 두는 일이 많다고 하였다. 임모로 공부하였으므로 10년 동안 글씨를 예쁘게, 또는 원본대로 쓰는 솜씨는 늘었지만 내 글씨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스승 글씨를 복제만 하더라고 하였다.

 이 글을 도입하는 부분에 서예정신과 역사의식이라는 말을 썼다. 역사의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예의 역사성으로 이해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서예를 중국에서는 서법이라고 하듯이, 역사성이라고 하면 서법은 예술적 표현보다 먼저 필사(筆寫)가 우선이었다. 글씨의 뜻이 명확하도록 쓰는 것이 우선이었다. 언어란 의미를 담는 것이 목적이다. 예술적 표현은 부수적인 목적이다. 그렇다면 글자를 익히는 방법은 서법을 정확하게 익혀야 한다. 임모가 절대로 필요하였다. 언어의 어원을 따지듯이 역사성을 따진다면 필사의 임모가 서예의 학습법이 된 것이 아닐까? 임모는 글씨가 의미를 나타내는 법칙을 배우는 방법이었다면 창작의 기법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테라코타 인형 만들기를 공부하고 오신 분이 한국에서 인형을 만들면서 일본색을 털어내는 데 10년이 더 걸리더라고 하였다. 그만큼 손으로 익힌 것을 떨쳐내기는 어렵다.

 

  서예를 예술의 한 장르로 인식하고 공부한다면 임모의 방법은 과감히 버릴 때가 아닌가. 임모는 예술 창작의 방법이 아니고 한문자의 법칙을 배우는 방법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서예를 10년 동안 공부한 사람이 길을 잃지 않고 자기 방식의 창작법으로 나아가려면 임모로 공부해서는 아니 된다. 임모로 공부하면 그만큼 자기의 작품을 창작하기가 어려워진다. 자기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서예에서 손을 뗀다. 서예를 10년 쯤 하면 회의를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작품 자체가 하나의 기표가 되어서 의미를 전달하도록 창작의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

 

  복고의 방식을 고수하려면 방(倣)까지는 몰라도. 임모는 글쎄?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의 생각입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촌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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