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바알갛게 흐드러졌던 동백꽃을 보낸 자리에
애절한 상사화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호소하고
선운사 경내는 어두움이 포근히 내려온다..
잿빛 가사 위로 붉은 장삼 자락을 드리우고
목탁을 손에든 스님들이 흰 고무신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각각 법당으로 들어서서 경건하게 목례 올렸다
두무릎을 꿇어 겸손한 자세로 머리를 조아린 후
목젖을 타고 반야심경 천수경이 구성지게 흐르며
이따금 머리 숙여 경배했다
외롭게 서 있던 석등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히고
침묵하던 산들마저 모습을 숨긴 후
법고를 준비하는 익숙한 스님 뒤에
숙련된 리듬으로 울어대는 법고 소리는
이젠 쉬라는 소리이고
손을 놓으라는 시각이며
모든 만물을 잠재우려는 알림이라 했다
고요한 경내 수다스럽던 산새들도 숨을 죽이고
선운사 노스님의 잿빛 가사가
에너지를 모아 범종을 타종하니
웅장한 전율은 나래를 이끌고 개울을 건너며
다리와 숲을 지나 마을로 더듬더듬 내려가고
잔잔하고 낭랑한 리듬은 밀림을 가까스로 거슬러 오르며
두근거리는 나의 폐 부속으로 슬며시 파고들었다.
첫 번째 울림은 모두 비우라 하더니
두 번째 울림은 전부 품으라 했다
세 번째 울림은 나누고 베풀라 하고
네 번째는 언제나 어디서나 뒤를 돌아보라 했다
다섯 번째 울림은 서로 함께하라 하고
여섯 번째 울림은 늘 깨어 있으라 했다
일곱 번째 울림은 잊어야 할 것은 어서 잊으라 하며
여덟 번째 울림은 다 주워 담으라 하고
아홉 번째 울림은 어떤 말이든 들으라 했다
열 번째 울림은 받은 것은 반드시 기억하라 하고
열한 번째 울림은 맡은 일에 열정으로 힘쓰라 했다
열두 번째는 서운함도 서러움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며
열세 번째 울림은 늘 고마워하고 감사하라 했고
열네 번째 울림은 이 세상 모두를 아끼고 감싸고 다독이며 사랑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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